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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우방참전부대⑤|이디오피아 황제근위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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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이디오피아」정부는 한국전이 일어난 다음해인 51년5월7일 황제 근위대의 일부 병력을 1개 대대로 편성, 한국에 파병했다. 한국참전 16개국 중 정예를 자랑하는 황제 근위대를 참전시킨 것은 특이했다. 「이디오피아」의 참전은 「하일레·셀라시에」황제의 특명으로 이루어 졌으며 지상군으로서는 참전 16개국 중 가장 늦게 내한했지만 53년7월 휴전까지 약2년 동안에 겪은 여러 전투에서 다른 참전국에 비해 결코 손색없는 용명을 날렸다. 「이디오피아」참전군은 「카그뉴」대대라는 독특한 이름을 지니고 있었는데 「카그뉴」란 현 국왕의 부왕이 그의 애마에 지어주었던 이름을 그대로 따온 것이었다. 「카그뉴」대대는 한국전선에 1년 복무를 원칙으로 파견되어 전쟁기간동안 3개 대대가 교체했고 56년7윌 철군할 때까지 5개 대대 연병력 6천2백 명이 주둔했었다. 「이디오피아」군은 약2년간의 전투기간 동안 2백53회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고 전사 1백21명, 부상 5백36명으로 모두 6백57명의 인명피해를 냈다.

<3개 대대를 1년씩 교체 파병>
이 부대는 참전 이후 중동부전선인 강원도 산악지대에서 대부분의 전투를 겪었는데 화천지구에서 맞이한 첫 번째의 전투와 그후 피의 능선이 시작되는 문등리 계곡, 적근산, 금화, 철원 등 철의 삼각지전투가 격전으로 손꼽힐 수 있다.
「이디오피아」군 「카그뮤」대대의 한국전활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카그뉴」대대는 5월7일 선편으로 부산에 도착한 다음 6주간 미국 무기와 산악전에 대비할 특별훈련을 받고 미 제7사단 32연대에 배속되어 가평에 도착했다.
그 후 「카그뉴」대대는 화천군 상서면 산양리에서 8월2일부터 중공군 1개 연대규모의 병력과 처음으로 마주쳐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이 기간동안 적의 공격은 「카그뉴」대대의 정면을 향해 산발적으로 전개되었다. 적은 특유의 인해전술을 감행해오지 않고 대대 중대 또는 소대단위로 나누어 공격해왔다. 적은 계속 병력을 교체해 가면서 하루 또는 이틀간의 간격을 지니고 공격해왔기 때문에 「카그뮤」대대는 적의 공격에 대비하여 항상 경계태세를 늦출 수가 없었다. 8월2일부터 9월14일까지 42일 동안 집요하게 계속된 적의 공격을 「카그뉴」대대는 끈기 있게 잘 막아내 「이디오피아」군의 강인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 지역에 대한 중공군 공격은 대대병력이 1번, 중대단위가 6번, 소대병력규모가 12번으로 모두 19회에 감행되어 이틀에 한번씩 적의 공격을 맞이한 셈이었다.
또 이 전투에서 「카그뉴」대대는 적 사살 67명, 부상 1백58명, 생포 2명의 전과를 올렸다.
화천 북방 산양리에서 첫 개가를 올린 다음 「카그뉴」대대는 51년10월10일부러 52년2월14일까지는 한국전쟁 중 격전지로 이름 높은 「단장의 능선」, 문등리 계곡, 만대리의 「펀치볼」등지에서 싸웠다.
이 기간동안 전 전선은 소강상태를 이루고 있었으나 적의 정찰활동은 활발하여 피아간에 많은 손실을 입고 있었다.
「프랑스」군과 교체 「단장의 능선」상의 전선을 담당하고 있던 10월10일부터 27일까지 17일 동안 적의 경찰병력과 9회, 적 중대병력과 6회의 교전이 있었다.
이 소규모의 산발적인 전투에서 「카그뮤」대대는 적 79명을 사살하고 10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 후 「카그뉴」대대는 미31연대 1대대가 맡고 있던 전선으로 교체해 들어가 불리한 지형에 놓여있으면서도 잘 싸워 적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문등리 계곡이라고 불리는 이 곳은 「피의 능선」이 끝나는 곳에서 북으로 길게 이어져 있으며 좌우로는 험준한 산줄기가 연이어져 있다. 더우기 적은 이미 고지를 점령하고 있어 적에게 감제 당하는 입장에서 전투를 벌여야했다. 51년 11월8일 중동부전선에는 벌써 눈이 한자(척) 이상이나 쌓여 「이디오피아」군은 몸에 익숙하지 못한 설상 전투를 치러야만 했다. 열대성 기후에서 생활해 온 「이디오피아」군으로서는 매서운 추위를 참아가면서 눈 위에서 전투를 한다는 것은 전투이상의 혹독한 시련으로 표현되었다.
적은 이 무렵 「이디오피아」군 뿐 아니라 「피의 능선」을 따라 동서로 배치되어 있는 미 제2사단의 전 작전지역에 일제 공격을 병행했고 특히 9개 지역에 중점을 두어 포격을 가했다.
「카그뉴」대대가 맡고 있는 지역은 적이 집중포격 하는 지역 중에서도 전초지역에 해당되는 곳으로 가장 피해가 컸다.
적의 공격이 전 전선으로 넓혀짐에 따라 중대단위로 시작되었던 전투는 사단규모로 확대되어 2사단의 일부로 배속되어 있는 「카그뉴」대대는 적의 보급소를 공격, 파괴함으로써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적은 주 저항선의 보급소가 파괴되어 전선을 재정비하기 위해서는 아군에 대한 공격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 지역에서 적의 2차 공격이 12월14일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전선을 재정비한 적은 1차 때와 같은 규모의 전투를 시도했으나 「카그뉴」대대에 배속된 1백대의 미군 전차들이 맹렬히 활약하여 적의 공격을 좌절시켰다고 두 차례의 대공세를 성공적으로 물리친 「카그뉴」대대는 같은 해 「크리스머스」를 기해 49개의 「이디오피아」훈장과 9개의 미국훈장을 받았다.

<정찰대로 「철의 삼각지」살펴>
그 후 대대는 만대리로 이동, 12월27일부터 52년2월14일까지 「펀치볼」평야에 주둔하면서 적의 공격을 막았다.
1차로 파병된 동대대는 52년3월27일 1년간의 한국참전 기간이 만료되어 후속 제2 「카그뉴」대대와 임무를 교대, 한국을 떠났다. 제1「카그뉴」대대는 1년간의 참전기간 동안 73회의 대소전투를 치렀고 대대병력 중 47명이 전사, 1백49명이 부상해 모두 1백96명의 인명피해를 냈다.
「카그뉴」대대가 한국에 도착한 것은 52년3월말이었다. 동대대도 다른 참전국 부대와 마찬가지로 교육훈련을 마치고 52년6월초에 일선에 배치되었으나 본격적인 전투는 7월부터 「358고지」,「철의 삼각지」의 「지형능선」등의 전투에서 제1「카그뉴」대대 못지 않은 격전을 치렀다.
52년7월3일 제2「카그뉴」대대는 철의 삼각지 서남방 358고지를 기습,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고 14명의 정찰대를 출발시켰다.
이 무렵의 전선은 휴전회담이 교착상태에 들어가 전면적인 전투보다는 국부적인 전투가 활발했고 적군을 탐지하기 위한 정찰전이나 「포로 잡기 작전」이 한참 벌어지고 있었다.
「유엔」군 사령관의 작전보고서 49호(52년7월1 15일)는 『이 기간 중 적은 중부 및 동부전선에서 「유엔」군의 전 초진지에 대하여 대대병력까지의 부대를 사용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국부적인 공격을 시도해왔다.

<소대장 전사에 하사가 지휘도>
적의 공격은 모두 충분한 포 지원아래 이루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어 국지전이 지극히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358고지에 대한 정찰 전은 연일 계속되었는데 그 목적은 적을 포로로 하고 가능한 한 적에게 많은 손해를 주고 빨리 되돌아오는 것이었다. 이 정찰전에서 「카그뉴」대대는 적에게 1백80여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는 피해를 주었다. 계속되는 정찰전 중 7월24일 「티라예·운디마게구넨」중위가 지휘하는 소대의 기습 정찰전은 가장 처절했다.
정찰대는 358고지에서 적을 포로로 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날 밤8시30분 주 저항선을 출발했다. 정찰대가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에 적의 자동화기 및 수류탄이 비오듯 쏟아졌다. 기습작전이 적에게 노출된 것이다. 적의 일제사격으로 용감한 「티라예」중위가 쓰러지고 소대선임하사도 전사했다. 지휘관을 잃은 정찰대원들은 「베라누·데가가」하사의 지휘를 받아 적의 사격에 대항했다.
이미 적에게 노출된 후였으나 정찰대원들은 굴하지 않고 각자의 위치를 고수하여 오히려 적에게 보다 많은 피해를 입혔다. 이 소규모의 교전에서 정찰대는 장교를 포함하여 4명이 전사, 6명이 부상했고 적은 13명이 전사, 9명이 부상했다.
그 후의 「카그뉴」대대가 벌인 큰 전투는 52년10월23일「지형능선」에서 중공군의 대공격을 격퇴시킨 것을 들 수 있다.
지형능선은 수도고지와 이웃해 있는 금성동 쪽으로 철의 삼각지의 전초지역이나 다름없는 요지였다. 이 때문에 중부전선의 적은 이곳을 공격의 주요목표로 삼고 있었다(주 이곳에서의 한국군의 활동은 이미 본 연재 389회로 소개했다).

<지형능선서 적대대병력 섬멸>
중공군은 1개 대대병력으로 「카그뉴」대대의 전면을 집중공격 해 왔다. 적은 아군이 확보하고 있는 고지를 뺏기 위한 목적으로 약20분간 강력한 포격을 앞세워 공격했다. 적의 공격을 맞이한 것은 동대대 제4중대였다. 적은 지원포격이 끝나기가 무섭게 물밀듯이 몰려들어 제4중대의 진지 내 15「야드」까지 육박해 들어와 피아를 구별하기 힘든 백병전을 전개했다. 대대장 「아스포·반다지」중령은 『최후의 1발을 다 쏠 때까지 진지를 확보하라』고 독전했다.
이 때의 적은 우선 숫적으로 우세하여 4중대만으로는 진지를 고수하기는 힘든 형편이었다. 시간을 더 이상 지체했다가는 적에게 완전히 유린될 위급한 상황에서 제2중대가 4중대를 지원하기 위해 도착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카그뉴」대대 포병은 4중대 전방 25m지점, 즉 적의 주력이 집결되어 있는 곳에 정확하게 포격을 가해 적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이날 공격해 온 적대대병력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큰 타격을 입었다. 이 전투는 「이디오피아」군이 한국에서 치른 전투 중 가장 빛나는 승리로 기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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