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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7)피 어린 산과 언덕(2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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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편집자주=백마고지 전투는 본 연재 386, 387의 2회로 일단 끝을 맺었으나 당시 9사단 30연대 1대대장이었던 김영선 소장이 당시의 전투기록을 상세히 보내왔고 또한 당시의 30연대장 임익순씨의 새로운 증언도 있고 해서 속편으로 1회 더 소개합니다.
52년10월6일부터 14일까지 9일 동안 벌어진 백마고지 전투는 중공군이 한국전에 개입한 이래 조직적이고도 치열한 공격을 감행했다는 점에서 당시 중동부 전선에서 가장 치열한 격전으로 손꼽히고 있다. 중공군은 백마고지 공격에 앞서 2개월 이상이나 백마고지와 똑같은 지형을 택해 모의 공격훈련까지 실시했던 것만 보아도 적이 이 지역을 얼마나 중요시했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중공군은 철의 삼각지를 제압, 아군의 저항선을 철원 이남으로 밀어내기 위해 특히 백마고지 공격에 총력을 기울인 것이다. 9일 동안 23번이나 주인이 바뀌는 처절한 전투에서 자기 한 몸을 희생하여 적진돌파를 위한 혈로를 열어준 3군신의 이야기는 전쟁무용담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중공군의 대공세는 귀순병 「곡」중교(중령)의 진술로 그들의 공격을 미리 알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으나 적은 2개 사단 규모의 병력을 집중 투입했기 때문에 뺏고 빼앗는 혼전을 벌이게 되었다.
다음은 이 전투의 아군 주역을 맡았던 30연대 연대장 및 대대장의 이야기.

<중공군 중령급이 귀순해 제보>
▲임익순씨(당시 9사단 30연대장=대령·예비역 대령·현 사업·56) <전쟁 중이라 해도 추석이면 나는 무명용사들의 영령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냈읍니다. 이때도 추석 올리고 있는데 2대대장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중공군 귀순병이 지휘관을 만나야만 이야기하겠다는 거예요. 32세 가량된 귀순병은 중령급으로 다음날인 10월4일 군단이상의 상당한 병력으로 대공세가 있다는 것이었어요. 긴급 작전회의를 소집하고 적의 공격에 대비한 방어작전을 세웠읍니다.
이틀 후 적은 3개 대대 병력을 집중시켜 파상공격을 해왔는데 우리는 1개 대대만으로 2천여명의 적을 사살했읍니다.
이 같은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김종오 사단장이 『호를 깊이 파야 산다』고 평소 강조하듯이 고지의 축성이 완전했고 또 나는 예비 연대로 있을 때에 항상 사병들에게 1천「인치」(25.4㎝)사격훈련을 시켜 전사병들의 근거리 사격이 특출했기 때문입니다.
백마고지를 놓고 약1주일 동안 주고받는 격전을 벌인 후 마지막 공격을 시작했을 때 나는 사단장에게 예비 사격을 하지 말도록 건의하고 각 중대장들에게는 ①은밀하면서도 신속히 움직이고 ②고지를 점령했을 때는 진지 안에 빨리 숨고 ③경계를 철저히 할 것 등 세 가지 항목을 지시했읍니다.
아침9시에 공격을 시작하여 2시간만에 목표 고지를 점령했는데 적은 예비공격이 전혀 없자 우리의 공격이 없는 줄 알고 방심해 있다가 우리의 기습에 완전히 휘말린 것입니다. 내 작전이 적중 했다고나 할까요.
우리가 주봉을 점령한데 이어 29연대가 전초 기지인 화랑능선을 탈환하고 나서부터는 백마고지에 대한 적의 위험은 완전히 없어졌읍니다.
원래 이 고지는 이름 없이 395고지라 불렸는데 긴급작전회의 때 부연대장 조연표 중령이 「백마」라고 이름 지었어요. 고지가 말처럼 생긴데다가 토질이 백토여서 포격으로 벗겨진 능선은 마치 백마 등 같기도 했읍니다. 그후 우리 30연대만 「백마부대」라고 했는데 김종오 사단장이 기왕이면 사단의 이름으로 하자고 해서 9사단이 백마사단이 되었읍니다.>

<일곱 겹 철조망 모두 끊어지고>
▲김영선씨(당시 30연대 1대대장=소령·현 소장·43) <52년10월3일은 개천절에다가 추석이 겹쳐 각 연대는 친선 경기를 벌이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철원 시내에 있는 연대본부에서 긴급작전회의를 연다고 소집했어요. 이 자리에서 귀순해온 중공군 장교의 진술로는 4일 24시를 기해 전면 대 공세가 있다는 것이었어요. 더우기 적은 봉래호 수문을 열어 백마고지 뒤로 흐르는 역곡천을 범람케 하여 고지를 고립시킨다는 계획이어서 이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있었읍니다.
적은 이틀 후인 6일 저녁 7시부터 공격해 왔어요.
적의 1차 공격은 전초 진지인 「화랑능선」과 395m 높이의 주봉에서 동으로 뻗은 작은 봉우리에 집중되었어요.
대대 OP에서 조명탄을 쏘아 관측해 보니 적은 산개하지도 않고 새까맣게 달라붙었더군요.
밤10시40분쯤 적의 2차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는 통신망이 모두 파괴되어 전황을 파악할 길이 없어 나는 당번병을 데리고 일선 중대를 돌아보았읍니다.
주봉 왼쪽 봉우리의 2중대는 조금도 동요의 빛이 없이 교전 중이었으나 전초 중대로 나가있던 3대대 10중대는 적에 포위되어 일부가 무질서하게 철수하고 있었읍니다.
또한 우리 3중대와 3대대 10중대가 맡고 있는 오른쪽 고지는 10중대의 방어선이 뚫려 28연대 1대대가 역습하는 중이었고 3중대는 10중대가 무너지자 병력을 신속히 조정하여 전면 방어할 수 있도록 배치해 놓고 있더군요.
적의 포격으로 일곱 겹의 철조망은 모두 끊겨 버렸고 한길 이상 깊게 파 놓았던 교통호는 발목 하나를 제대로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 흙 속에 전사자의 시체가 즐비했읍니다.
그러나 우리 병사들은 가까이 올라온 적을 백병전으로 물리치고 몸을 숨길 생각도 않은 채 대낮 같은 조명탄 불빛아래 편한 자세로 고지를 기어오르는 적을 저격하여 새벽 6시쯤에는 적의 공격을 일단 물리칠 수가 있었어요.
28연대의 역습이 주효하여 해가 뜨기 전에 10중대 지역은 회복할 수가 있었으나 전초 「화랑능선」은 뺏기고 말았어요.
7일 저녁 중공군은 다시 인해전술로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와 결국 이날 밤 백마고지 주봉을 잃고 말았어요. 28연대와 3중대가 맡고 있던 오른쪽 고지가 적 수중에 떨어지고 나니 주봉이 적으로부터 전후방에서 협공을 받게 되어 더 이상 확보할 수가 없더군요.
적의 공격 규모가 워낙 컸기 때문에 1개 중대로는 도저히 방어할 수가 없었읍니다. 그 왼쪽지역을 맡고 있던 「프랑스」대대도 이미 후퇴해 버린 다음이었어요. 2중대장 서두수 중위는 포위 공격하는 적을 물리치기 위해 진두 지휘하다가 적탄에 맞아 전사했읍니다. 하는 수 없이 왼쪽지역으로 철수했고, 우리는 이곳에서 고립된 상태가 되었지요. 그후 며칠동안 3개 연대의 8개 대대 병력이 주봉 공격에 나섰으나 성공하지 못했어요.
적은 우리가 확보하고 있는 고지보다 높은 주봉에서 계속 우리를 내려다보며 공격해 왔으므로 낮은 지형에서 이를 지키는데는 많은 출혈을 각오하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병사들은 물론 몇몇 참모와 중대장들까지도 철수할 것을 건의했으나 나는 이를 묵살했읍니다.
결국 이 고지가 발판이 되어 28, 29연대가 백마 주봉을 공격하여 뺏고 빼앗겨 주인을 23번이나 바꾸는 격전을 벌이게 되었죠.

<점령 못하면 살아서 돌아 안가>
그런데 10일 갑자기 연대로부터 수색중대와 교대하여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어요. 이 명령은 그 동안의 공격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되자 방어만 맡았을 뿐 공격에는 한번도 투입되지 않았던 우리 1대대를 재정비시켜 공격에 내보내라는 김종오 사단장의 복안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사단장에게 『고지를 점령하는 것은 꼭 장담할 수는 없으나 점령하지 못하고서는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고 말하고 2박3일간 대대를 정비한 다음 12일 새벽 공격에 나섰읍니다.
여기에서 유명한 9사단의 3군신 이야기가 등장합디다.
죽음을 각오한 병사들은 소총을 등에 메고 수류탄을 앞에 들고 포복해 기어올라가 수류탄을 던지고 쓰러지면 다른 병사가 뒤이어 쓰러진 전우의 시체를 밟고 나아가 싸우기를 거듭하면서 고지 정상을 향해 올라갔읍니다. 고지 공격이 절정에 달했을 때 1중대장 구본원 대위로부터 전보가 왔어요. 전화라고는 하지만 불과 3백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어서 내려다 보이는 곳이지요.

<김정을 병장 혼자 적 70명 사살>
구 대위는 자기중대는 소대장이 절반 이상 부상을 입었고 병사들도 30명 정도 밖에 남지 않아 공격할 능력이 없으니 예비대와 교대해 달라는 것이었읍니다.
나는 『우리는 이미 죽기를 각오하지 않았는가. 전우가 죽었다고 해서 물러난다는 것은 말도 안돼』라고 소리치며 다시 공격할 것을 명령했읍니다.
얼마 안 있어 30명밖에 없다는 1중 대원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고 수류탄을 던지며 정상을 향해 돌진하더니 마침내 점령했어요.
고지를 점령하기 직전, 적의 저항이 워낙 완강하여 아군이 도저히 올라설 수 없게 되자 당시 1중대 3소대장 강승우 소위와 오귀봉, 안영권 두 병장은 육탄으로 부대 혈로를 뚫고 장렬한 최후를 마쳤읍니다.
이들 3명은 백마고지의 좌측 공격을 맡고 있었는데 진지 전방 50「야드」까지 육박했으나 단말마적인 적의 사격 선을 도저히 돌파할 수가 없게 되자 TNT를 등에 지고 적 진지에 뛰어들어 폭사하면서 중대원들이 돌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읍니다.
정상을 점령한 다음 1중대 인사계는 『중대장은 중상을 입었고 소대장은 2명이 전사, 나머지 1명도 부상하여 지휘할 수 있는 장교는 1명도 없으며 중대원은 모두 10명도 안 된다』고 전화로 보고해 왔어요.
나는 곧 예비대인 2중대가 고지를 인수받게 하여 방어선을 폈읍니다. 예상했던 대로 적은 이날 밤 두 차례에 걸쳐 대대규모의 반격을 시도했으나 모두 격퇴시켰읍니다.
그후 이틀 동안 만도 7차례나 중공군의 반격을 받았지만 우리 장병들은 고지를 사수했읍니다. 특히 이때에 기관총 사수였던 김정을 병장은 단신으로 적 7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읍니다.>
◆주요일지(1952년 7월25∼28일)
※25일 ▲「유엔」군사, 포로교환에 관한 18회의 비밀회담 무성과라고 발표 ▲임영신 여사도 부통령 출마 발표 ▲「이집트」서 경찰 폭동 진압
※26일 ▲이승만 박사, 차기대통령 출마 승낙 ▲미 민주당대회 「스티븐슨」후보 결정
※27일 ▲MIG「제트」기, 영함 재기 3대에 손해 ▲애급 전 육군총사령관 체포
※28일 ▲미 공군, 비행접시 정체규명에 전력발표 ▲「그리스」·「불가리아」국경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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