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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8)<제28화>북간도(18)이지택(제자 이지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3월 13일 전야>
이 무렵에 북간도에는 한족 독립기성회라는 것이 조직되었다. 3·1만세가 있기 전 결성된 이 단체의 구성 경위를 얘기해야겠다.
앞서 강봉우가 국내로 돌아오는 것과 때를 같이해서 노령의 한국인에게 독립운동을 고취하기 위해 김약연과 정재면이 파견토록 짜여 있었는데 정작 떠난 것은 1919년 2월께였다.
이 때를 택한 것은 「파리」의 만국강화회의에 즈음해서 「아시아」에 사는 한국인들이 모여 전노 한족 중앙총회를 열었다(이 회의는 훗날 만주·간도의 한국인을 포함해서 대한민국 의회로 개칭되었다) .
김약연 정재면은 이중집이란 사람을 데리고 간도 및 북만주 한족대표로서 「러시아」영인 「니콜리스크」에 참석했었다.
이때 김·정 등은 상해서 온 여운형과도 만나고 이동휘와도 만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회의는 지방색 때문에 대동 단결하여 독립을 쟁취하자는 무오 독립선언의 뜻을 구현하지 못한 채 끝났는데, 이때 김약연은 연설을 통해서 『올해는 우리 한민족의 운명을 결정하는 해입니다』고 지적했던 것이다.
회의가 결과 없이 끝나자 곧 돌아온 김약연은 북간도의 동지를 모아 힘을 길러야겠다고 믿게 되어 한족독립기성회를 만든 것이었다.
이의 회장은 구춘선(합명당), 부회장 마진(대납자), 의사부원에 유례균(팔도구) 김병협(양구하) 최원일(국자가) 고용환(평강) 배형식(평강) 이태현(적암평) 이봉우(합명당) 김순문(일양구) 김양연(명동) 신명덕(?) 정재면(용정) 김신근(용정) 최지익(봉림하) 박약훈(평강) 이며 재무부원에 유찬희 서성권 장석함, 교섭부원에 고용환 배형식 편집부원에 유하천 최기학 김정, 통신부원에 이홍준 강백규 김상호, 번위부원에 박정훈 최웅렬 이춘성 장우범 등이었다.
이 같은 조직이 있음으로써 강봉우가 전달한 독립선언서로써 3·1만세의 실현이 추진된 것이다.
그런데 전희에서 말한 독립선언서 복사장소에 악간의 차가 있어 이번에 바로 밝히고자 한다.
분명히 내가 선언서를 전했고 김약연의 지시로 명동중학 지하실에서 연락문서를 「프린트」했다.
이것이 일부 문헌에서는 은진중학교의 지하실에서 등사했다고 되어 있는데 은진중학교는 3·1운동 다음해인 1920년 2월 4일에 창립된 것으로 잘못인 것이다.
이때 국내에 가져 온 선언서와는 별도로 북만주 조선민족대표자 17명(독립기성회대표들) 이 서명한 독립선언서가 따로 있었다. 이 선언서는 뒤에 15만원 의거사건의 주인공이 되는 윤준희가 책임을 지고 비밀리에 「캐나다」선교부에서 경영하는 제창병원 지하실에서 인쇄했었다.(뒤에 은진중학교가 바로 이영국 언덕이라 불리는 곳에 세워진 탓으로 착오가 난 듯 하다).
어쨌든 선언서와 연락문서가 그곳서 인쇄됨으로써 3·1만세의 기운이 익어갔으나 이 정보를 미리 잡은 일본영사관과 중국 관현과의 사이에 미묘한 움직임이 벌어졌다.
만세 의거 일은 3월 13일로 잡고 있었다.
그래서 하루전인 12일에는 북간도 독립선언서 서명자 17명의 이름으로 중화민국정부와 북경외교부·길림성장 앞으로 대한독립에 관한 통첩을 보냈다.
또 한편으로는 용정중앙교회의 목사였던 박례헌씨를 통해 이른바 용정의 영국언덕이라 불리는 외국선교사들에게 사전에 통고해주었다.
이때 우리 만세를 가장 열렬하게 지원해준 이가 서고도 선교사(스코트)였다. 서 선교사는 북경에 주재하는 영국·미국공사를 비롯해서 기독교계통의 전 교회에 통보해 주었었다.
이 정보는 이미 1주일 전부터 일본영사관의 밀정이 탐지하는바 있었다. 이에 따라 중국 측에 온갖 외교적인 압력을 넣은 것이다.
그들의 구실은 한마디로 『조선인은 일본제국의 국민이니 집회의 경비는 반드시 일본영사관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독립만세를 주관한 독립기성회는 선수를 쳤다.
연길도윤 도빈에게 『3월 13일 거사하되 장소는 용정 중앙보통학교 뒤 울타리 바깥, 즉 일본영사관의 치외법권지역 밖의 채소밭에서 가진다. 즉 중국영토에서 모임을 갖는 것이니 중국 측에서 경비해 주어야 한다』고 요청한 것이다.
도빈 도윤은 이를 「쾌히」승낙해주는 한편 일본에 대해서 『식장이 치외법권지역 밖인 중국영토이다. 귀 측이 요구하는 경비운운은 부당하다』고 일축해 버렸다.
도빈은 중국 육군소장에 해당하는 맹부덕 휘하 2천명의 병력으로 식장과 간도 일원을 경비하도록 한 것이다.
일본영사관측은 이같이 자기들의 요청이 거절되자 헌병들에게 중국복을 입히고 권총으로 무장시켜 중국 경비군 속에 잠입시켰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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