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넬슨 만델라, 평탄치 않았던 가족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4면

지난해 7월 만델라(오른쪽)의 94세 생일을 맞아 그의 고향인 쿠누 마을 저택에 딸들과 손주 등 가족이 모여 축하하고 있다. [로이터=뉴스1]

세계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이지만 가정사는 그리 평탄치 않았다. 이는 어쩌면 일찍이 반(反)아파르트헤이트(흑백 분리 정책) 투쟁에 헌신한 그의 예견된 운명이기도 했다. 27년을 옥중에서 보낸 그에게는 충실한 남편, 살가운 아버지로 살 여유가 허락되지 않았다.

 만델라는 모두 세 차례 결혼했다. 총 6명의 자녀를 뒀지만 이 중 3명은 만델라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의 삶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으며, 그가 적지 않은 개인적 고뇌를 안고 살았음이 읽히는 대목이다.

 그의 첫 부인은 간호사이자 아프리카민족회의(ANC) 활동가였던 에블린 은토코 마세(1922~2004)다. 만델라는 친구의 사촌인 에블린을 만나 1944년 결혼해 2남2녀를 두었다. 결혼생활은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이 시기에 만델라는 흑인인권운동에 더욱 깊이 빠져들었고, 이에 지친 에블린은 정치적 중립을 고수하는 여호와의 증인으로 개종했다. 결국 57년 13년간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에블린은 만델라가 대통령이 된 후에도 언론에 종종 등장했다. 그는 “만델라가 그저 인간일 뿐인데 사람들이 그를 신격화하고 있다”며 만델라와 주변인들을 비난하기도 했다. 에블린의 이런 태도는 98년 한 사업가와 재혼할 때까지 이어졌다. 2004년 사망한 에블린의 장례식에 만델라는 두 번째 부인 위니와 세 번째 부인 그라사 마셸(68)과 함께 자리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첫 결혼 실패 직후인 58년, 만델라는 위니와 결혼했다. 둘은 두 딸을 낳았으며 만델라 수감 중에도 혼인 관계를 유지했다. 불화는 오히려 만델라가 석방된 후 불거졌다. 유력 여성 정치인으로서 남편보다 급진적이었던 위니는 화해와 협상보다는 투쟁을 강조했다. 만델라와는 다른 노선이었다. 게다가 만델라 수감 시절에 위니에게 다른 남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폭로됐고, 뇌물 수수 등 각종 잡음도 끊이지 않았다. 소웨토 지역에서 발생한 한 살인사건에 대한 위니의 관련설이 확산되자 결국 둘은 96년 협의 이혼했다.

 만델라는 98년 80세 생일을 맞아 세 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상대는 오랜 친구로 지낸 마셸이었다. 마셸은 86년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한 사모라 마셸 전 모잠비크 대통령의 부인이다. 90년대 초부터 만델라와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주요 국제 행사에 동행했다.

 만델라는 인간적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첫 결혼에서 얻은 장남 마디바 템베킬레의 사망을 꼽았다. 템베킬레는 23세 때인 69년 교통사고로 숨졌다. 2010년 출간된 만델라의 자서전 『나 자신과의 대화』에서 “아들의 사고 소식을 듣고 온 몸을 떨었다”고 고백했다.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4남매 중 차남 마가토는 2005년 에이즈로 단명했다. 현재 생존해 있는 만델라의 자녀는 첫 결혼 때 낳은 4남매 중 막내딸 마카지웨(60)와 두 번째 결혼생활에서 태어난 제나니(55)와 진지(53)다. 하지만 최근엔 마카지웨와 제나니가 만델라 재단 운영을 놓고 아버지의 옛 동지들과 소송을 벌여 말년의 만델라 마음을 상하게 하기도 했다.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에 따르면 만델라는 생전에 자서전 인세와 펀드 27개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가족들은 ‘만델라’라는 브랜드로 다수의 와인·의류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만델라라는 이름의 유명세에 힘입어 그것들의 자산가치가 1000만 파운드(약 173억원)에 이른다는 평가도 나온다. 일각에서는 만델라의 자손들이 브랜드를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이용한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전영선 기자

관련기사
▶ 만델라 장례식에 오바마·부시는 함께, 클린턴은 따로…왜?
▶ 10일간 국장…대통령 취임한 곳에 유리관 안치
▶ 영화 '만델라' 시사회 중 급보…배우·관객 함께 눈물
▶ '보통 사람' 꿈꾸던 만델라…투쟁 한복판으로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