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8)<제 28화>북간도(8)이지택<제자 이지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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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규암재에서 명동 서숙으로>
규암재가 명동 서숙으로 된 것은 1908년이었다. 김약연은 이 명동 서숙에서 구 한국 시대의 교과서를 중심으로 새 교육을 실시했는데 특기 할 것은 이상설의 서전의숙의 운영에 참가했던 박무림(본명 박정서)이 바로 김약연의 동지이며 심복으로서 학문 연구를 위해 파견(?)되었던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상설과 김약연은 상당히 깊은 유대가 있었던 것 같다. 규의재서 공부한 사람으로서 조두용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뒤에 용정의 일본 영사관을 불태운 이른바 일 영사관 방화 사건의 주동 인물로서 항일 운동을 벌였다.
정재면이 명동에 온 경위는 두 가지로 설명되고 있다. 하나는 서울의 기독교 청년 학교를 나온 정을 김약연이 초빙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상설이 천거했다는 것이다. 두 길이 일치치 했을지도 알 수 없다.
어쨌든 정재면은 명동 서숙의 학감 같은 자격으로 부임했는데 부임할 때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다.
기독교 교육을 받은 정재면 은 기숙에서 매일 예배를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교 정신이 투철하며 기독교계 등의 학교가 아닌 서숙에서 기도를 올리는 것은 약간 문젯거리여서 마을 사람들이 며칠을 두고 「고려」한 끝에『좋은 선생을 모시자니 할 수 없다』고 양보하고 말았다는 일화가 있다.
한국이 일본에 완전 합병되어 한국에서는 구 한국 시대의 교과서 등을 쓰지 못하게 됐으나 명동 서숙에서는 그대로 낡은 교과서로 새 교육을 실시했다.
학교에서 예배를 보게 되는 것을 전후하여 명동 교회가 마을 한 가운데 들어섰다.
이 교회서 일 보던 목사에는 문재린씨가 지금 생존해 있다.
문재린씨는 규암재 출신이다.
71년에 「캐나다」로 아들을 따라 갔으나 곧 귀국한다는 소식이 있다.
명동 서숙은 2년 뒤인 1909년에 명동 학교로 개편했다.
누가인가를 해 주는 것이 아니어서 사숙 형태이지만 학교라는 간판을 걸게 되자 교사가 필요해 졌다. 제일 먼저 초빙된 사람이 청년 역사 학자 황의민이었다.
황의민은 그때 25∼27세의 혈기방장 한 젊은이로 한성 영어 학원을 마친 것으로 나는 기억하고 있다. 요절한 황윤석 여 판사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다.
그 다음에 온 사람이 박태환과 한글학자 장지연 이었다. 박태환은 지금 정신 여고 교장인 박희경씨의 선친인데 정의돈·정재면 등과 잘 아는 사이였다. 이분들이 모이자 교사진은 쟁쟁해졌다.
쟁쟁한 인물들이 모여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일부러 아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함북의 회령 등 지방에서 보내어 학생들이 많이 몰려 명동으로 가는 길에는 인적이 그치지 않았다.
「시베리아」에서도 학생들이 왔다. 멀리서 오는 학생들은 10명이나 15명씩 떼를 지어 왔고 학생들이 올 때마다 재학생들은 약20리 앞마을 어귀까지 마중 나가 환영해 주면 처음 보는 동포들이 삽시간에 십년지기처럼 친숙해 지는 것이다. 이 무렵엔 별다른 노래가 없어 흔히 학생들을 맞을 때『북간도 행가』를 불러 슬픔을 달랬다.
1. 앞마을 논밭에 신작로 나더니 칼 찬 나리 마슬(을)에 새다 감 나고 퉁퉁 고개 십리 고개 자동차 넘더니 김 서방 이 서방 북간도 가네. 에헤 이야 데헤이야 우리의 마술
말썽도 많네 <후렴>
2. 앞거리 골목에 양철통 달리니 담배는 마음대로 심을 수 없고 이 골목 저 골목 물지게 나더니 최 서방 박 서방 북간도 가네. 하는 노래였다. 물론 작곡·작사자가 밝혀지지 않는다.
이렇게 모인 학생들은 모두 학교에서 밥을 먹여 주고 가리켰다.
김약연은 명동 학교를 운영하면서 교사들에게 극진한 대접을 했다.
자기는 조밥을 먹었지만 교사들을 위해서는 40리나 떨어진 용정까지 사람을 보내 쌀을 사 왔고 쌀은 늘 떨어뜨리지 않았다. 교사들은 송구스러워 했으나 김약연은 그때마다 그 정신을 2세에게 받치라고 했다.
김약연은「인재」가 있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모시려고 했다. 따라서 지나가는 과객이나 망명객이 명동에 들르면 꼭 만나 사람됨을 살폈다.
한·일 합방 후에는 북간도로 오는 동포가 더욱 늘었다.
명동 마을에 이르면 의례 해가 중천에 걸려 있어도 쉬어 가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손님이 왔다』고 하면 김약연은 오늘 저녁은 『아무개, 아무개 집에서 유숙케 하라』고 그 지시를 했다.
그리고는 밤에 자기 집으로 불러 북간도에 오게 된 경위 등을 얘기하며 그 사람을 관찰하는 것이었다.
자연히 왜경의 앞잡이가 많이 끼여 있었다. 그러나 위험을 겪는 일은 적었고 많은 인재를 찾았다.
1911년 뒤에 상해 임시 정부 초대 국무 총리를 지낸 이동휘가 명동에 왔었다.
이것이 이동휘와 김약연의 첫 대면이었는데 이때 이동휘는 부흥 사경 회를 인도하고 여성 교육을 역설했다.
이 뜻에 감동한 김약연이 명동 학교에 명동 여학교를 병설한 것이었다. 이 보다 조금뒤 김홍일도 명동에 나타났다. <계속>
전회에서 규중재가 1908년에 세워진으로 된 것은 1901년의 잘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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