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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유배지서 마친 비운의 생애|「줄리아」…순절의 한국 여인|동경 남쪽 백70km 절해 고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역사상 가장 잔인하며 또한 이유 없는 전쟁』 이었던 임진란에 고아가 돼 원수의 나라로 건너와서는 다시 일본 천하를 가름한 「세끼가하라」싸움에서 양부 소서행장을 잃어 이번에는 승자의 시녀로서 미덕을 떨치다 끝내는 유형지에서 순교한「오다·줄리아」-그 기구했던 유배의 막이 내려진 고도로 기지는 「무덤」 을 찾아 나섰다.

<기와집 모양의 묘표>
동경서 「이두급」특급으로 1시간 남짓, 이름난 동천장「아다미」 (열순)를 지나면 왼편 차창 밖으로 한적한 어항「아지로」 (망대) 항이 보인다. 오른편에는 신간선이 일본 최장의 단 방 「터널」을 뚫어 넘어야 했던 험준한 산맥들I 「오마·줄리아」는 「시즈오까」(정강) 에서 이 산마루를 맨발로 걸어 넘어 망대 항에서 유배의 섬으로 떠났다.
특급이 2시간을 더 달려 닿은 이 두우 반도 남단의 「시모다」 (하전항) 에서 1천t이 넘는 객선으로 갈아타고서 다시 3시간만에 신진도 유일의 선착장에 닿았다.
둘레 22km, 넓이 불과 1천8백58km에 해발5백78m짜리 4개의 산이 자리잡아 평지라고는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고 험준한 지형 때문에 지금도 섬 일주 도로가 없다.
선착장 바로 뒤에 옹기종기 모인 단 하나의 마을 신진도촌은 마을 어귀서부터 가파로운 오르막길. 오른쪽으로 마을을 거의 벗어날 무렵 해서 듬성한 숲 속에 30평 남짓한 유형자 묘지가 인가에 둘러싸여 있었다.
골목길 모서리에 두 면을 1m정도 높이의 돌 축대로 쌓아 올린 묘지의 계단을 오르면 양편에 30개가 넘는 자그마한 이끼 낀 묘비들이 무질서하게 늘어서 있고 그 안쪽에 주변과는 어울리지 않는 기와집 모양의 이색적 묘표가 자리 잡고 있다. 이것이「오다·줄리아」의 묘이다.

<석탑 4면엔 십자가>
무덤의 주인공들은 모두가 일운종의 고승 대덕 스님과 신자들이고 이 가운데 단 하나 「줄리아」 의 묘표 만은 십자가가 사면에 새겨진 2m 남짓의 2층 석탑. 「줄리아」의 묘임이 밝혀지기 이전의 오랜 옛날부터 대대로 이 묘에만은 향을 꽂지 않고 열 십자로 엮어서 뉘어 놓는다는 마을 최 연장자 「시미즈」(청수·76세) 노인의 얘기다.
2천4백명의 도민들은 전부가 정토종 신자. 그러면서도 마을 여인들은 매일처럼 묘지를 쓸고 꽃을 갈아 꽂아 왔다. 이 묘에 공을 들이면 여인들의 자궁병이 없다는 전설이 있고 누군지 는 모르지만 아름답고 부덕을 갖춘 여인의 무덤이라는 것만은 전해져 마을 사람들은 이 무덤만은 특별히 소중하게 모셔 왔다는 것이다.
덕천가강이 아끼는 시녀로서 성중에서 익힌 덕망 있는 여인으로서의 몸가짐이 섬 여인들을 감화시키고 성중에서 터득한바 부인병을 다스리는 솜씨가「줄리아」생존시 섬의 여인들에게 베풀어져 그것이 전설화하여 지금에까지 전해 내려온 것 갈다는 앵정씨(67세· 「줄리아」 현형회 부회장)의 설명이다.

<마을 공원엔 송덕비>
석탑의 2층 부분은 태풍으로 넘어져 명치 때 다시 만들었고, 나머지 부분도 석질로 봐서 1800년께 중건된 것이나 당초의 모습만은 그대로 살린 것 같은 「줄리아」묘의 불가사의는 덕천가강의 금교령 이후 탄압이 격심했던 당시에 어떻게 십자가를 탑신에 새길 수 있었느냐는 점이다.
아쉬운 것은 명치 32년, 마을에 큰불이 일어나 고문서 류가 모두 불 타 버려 마을에는 묘에 얽힌 자료가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40년 전에만 해도 제주도 해녀들이 원정 와서 오랫동안 체류, 섬의 남자와 결혼한 예도 있다는 신진도의 풍토에는 어딘가 한국적인 분위기도 엿 보인다. 온 섬이 가파로운 언덕길이기 때문에 섬의 여인들은 짐을 머리에 이고 다녔고 지금까지도 이것은 신진도 특유의 풍물로서 관광 명물이 되고 있다.「줄리아」가 이 섬에 유배 됐을 때의 인구는 7, 8명. 먹을 것도 귀한 외딴 섬에서 가냘픈 여인의 손으로 끼니를 이어가면서 40년을 살아야 했던 신고의 생애는 지금도 섬사람들의 놀라움으로 남아 있다. 「마쓰모도」 (송본) 촌장에 따르면 이렇듯 여인의 몸으로 40년을 살다간「줄리아」를 모범 삼아 최근에 부쩍 늘어난 섬 젊은이들의 이도 현상을 막기 위해 섬의 학교에서도 「줄리아」의 행적을 소상히 가리키고 있다. 해마다 5월에 열리는「줄리아」 제는 68년부터 시작해서 지난 5월이 다섯 번째. 작년에는 한국의 노 대주교도 참석했고 지금은 관동 지역의 여신자들이 5, 6백명, 한국에서도 40∼50명이 순례자처럼 찾아 들고 있다.
여름이면 관광객이 몰려 인구가 4배로 늘어나는 관광 「붐」을 타고 「줄리아」의 묘는 이제 섬의 명소가 됐고 섬 해수욕장에는 십자가를 목에건 여인들이 유난스레 많다고 한다. 묘지는 마을의 사적으로 지정됐고 「줄리아」제가 열리는 마을 공원에는 「줄리아」 공덕비가 세워졌으며 「줄리아」기념관 건립 구상도 구체화하고 있다. 이두 반도의 망대 항에서 배를 탄 「줄리아」는 곧 바로 신진도에 다다른 것이 아니다.
덕천막부가 유형지로 지정한 이두칠도의 섬들을 전전, 「오오지마」 (대도) , 「니이지마」(신도)를 거치는 경로를 밟았다.

<대도엔 등신대상 진열>
신진도에서 다시 배를 타고 「줄리아」의 유배「코스」를 거꾸로 거슬러 북상하기 2시간, 배는 「줄리아」가 두 번 째 기착했던 신도에 잠시 들른 다음 3시간을 더 달려 대도의「모도마찌」 (원정) 항에 도착했다. 잠시 기착한 탓인지 신도에서는 지금껏 「줄리아」의 발자취를 전혀 찾지 못했으나 대도에는 우선 원정 항의 자료 관에 「기모노」차림의 등신대 「줄리아」 상이 진열돼 있다.
원정 항에서 자동차로 이두칠도 최대의 섬인 대도를 반주, 섬 남단의 아름다운 항로 「하부」(파부) 항을 지나 등성이를 하나 넘으면 황량한 해안에 잇닿아 완만하게 경사가 진 황무지의 잡초 속에 「콘크리트」로 된 8m 남짓한 백색 십자가가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1958년 섬의 일본인 「가톨릭」 신도와, 동경의 한국인 신자들이 세운 것.
정작 「줄리아」의 유적 「오다이네」 사당은 잡초에 가리어 얼핏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높이 1m 정도의 둥근 돌로 쌓은 석실 속에 퇴색된 자그마한 석탑이 있고 그 앞에는 누가 켰는지 촛불이 사나운 바닷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근처 마을에서는 지금도 이 사당에 빌면 학질이 낫는다는 미신이 남아 있다. 사당 옆에 서 있는 것이「대롱명신」이라 쓰인 2m 정도의 석비로서 「줄리아」 가 정강에 있었던 덕천가강의 섬 중에서 「오다」로 불린 것과 견주어「줄리아」 의 유적임이 분명하다는 관계 전문가의 고증이다. 이 해안에서 5, 6백m 떨어진 바다 속에 필도라는 뾰족한 돌기둥이 10m정도의 높이로 솟아 있다. 「줄리아」는 이 필도에서 배를 타고 신도로 건너갔다고 전해진다. <박동순 주일 특파원 신진도 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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