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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4)<제자 이지택>|북간도(4)-이지택|제28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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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북간도 이주민>
용정은 자그마한 시가였다. 일본인도 없고, 우리 나라 사람도 그때는 별로 없었다. 장사꾼으로 정사빈이란 사람이 자투리 (포목) 장사를 하고 있었다. 또 시계 점을 하는 박씨라는 사람이 있었다.
용정에서 2백m 쯤 떨어진 곳에 새마을 (신촌) 이 있는데 회령서 온 윤씨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용정은 벌판 한가운데 이루어진, 시가로 청국 수비대, 중학교, 경찰서 요릿집 등이 있고 주민은2천명 가량 되었다.
새마을은 약2백 명의 우리 나라 사람들이 황무지를 개척, 새로 만든 마을이다.
마을의 위치는 해란강 바로 옆에 자리잡아 땅이 비옥해 주로 밭농사로 수수, 옥수수, 콩 등을 농사하고 있었다.
북간도의 땅이 얼마나 비옥했는가는 그 당시 함경도 일대뿐 아니라 경상도까지 소문이 퍼져 내륙과 남한에서도 이주민이 모여들었다.
우선 땅을 갈아 밭을 만들면 거름이 필요 없었다.
『조 이삭 하나로 허리를 동여매고, 감자 하나도 큰 사발에 담을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황무지를 갈아 부치면 예전에는 자기 땅이 되었다. 한국인의 이주가 많아져 중국인 지주가 있다 해도 소작료만 내면 얼마든지 밭농사를 할 수 있었다.
새마을에는 진가라는 지주가 있었고 토성 보에는 주가라는 지주가 있었다.
우리 나라 유랑민이 개척한 땅으로 용정을 사이에 두고 북으로는 새마을, 남으로는 토성보가 있었다. 토성 보에는 20여 가구가 살고 있었다.
토성보의 왕가 지주 소유의 땅은 장주 제도를 본 떠 왕가장이라 불려졌다.
간도의 기후는 대륙성 기후로 한서의 차이가 심하고 봄·가을은 아주 짧아 1년이 겨울과 여름만 있는 것 같이 생각되었다. 1월 평균 기온이 섭씨 영하15도 가량이고 기온이 내려갈 때는 영하 32도까지 내려가곤 했다. 서리는 10월부터 오기 시작하여 이듬해 4월까지. 그러나 5월이 되면 기온이 갑자기 올라가면서 우기가 되어 농작물 발육에 필요한 수분과 열을 흡족히 내려 주는 것이었다.
이열과 수분으로 농작물은 속하고도 완전한 성장을 하여 우수한 품질이 되는 것이었다. 기후로 봐서는 수전 경영에 적합했지만 우리 나라 이주민들은 거의가 황무지를 갈아 밭농사를 일구었다. 수로라든가 논을 만들기에는 경제적 여유가 없을 뿐 아니라 밭농사로도 쉽게 식량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고생되는 논농사는 별로 하려고 들 안 하는 것 같았다.
간도로의 한국인 이주의 첫 동기는 먹고 살 기름진 땅을 찾아 넘어간 것이었다. 1910년9월부터 1911년12월까지 북간도의 이주자는 1만7천7백53명.
이들의 이주 동기를 보면 ①간도·연해주의 땅이 기름져 생활하기가 쉽다. ②배일 사상을 가진 애국지사의 권유를 받았다. ③일제 병합 때문에 망명적 이주를 기도했다 ④일본인의 국내 진입으로 생활이 곤란해질 것을 염려해서이다 ⑤조세의 철수 방법 변경으로 조세가 가중되어 먹고살기가 힘들게 되었기 때문이다 ⑥함경도·평안도의 경우는 삼림령 실시로 그나마 붙여 먹던 화전을 잃었기 때문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이주자들 90% 이상이 생활인 난을 해결하기 위해 기름진 땅을 찾아온 것이었다.
조선 총독부 경무국의 기록을 보면 1910년에서 1925년 말까지 북간도 이주자 총수는 11만4천6백10명이고 서간 도로의 이주자는 10만7백50명이었다고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이 숫자보다 많아 1년에 평균 1만 수 천명이 간도를 찾아 들어간 셈이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지 압박을 벗어나 새 삶의 터전을 마련키 위해 빼앗긴 조국보다 났다고 찾아온 간도 땅이 유랑민을 반겨 줄 락토 일수는 또한 없었다.
이들이 낯선 땅에서 삶의 토대를 잡기까지의 고생이란 실로 비참의 극이 아닐 수 없었다. 만주 예수교 전문학교 「쿡」목사는 한국 유랑민들의 비참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겨울날 영하 40도의 혹한 속에서 흰옷을 입은 말없는 군중은 혹10여명 혹20명 혹은 50명 혹은 50명씩 때를 지어 산비탈을 기어 넘어온다….다수의 사람이 식량 부족으로 굶어 죽었다. 남루한 의복을 입은 여자들이 신체의 대부분을 노출한 채 유아를 등에 업고 간다.…피차에 고금이라도 체온을 돕고자 함이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다리는 남루한 옷 밖으로 나왔기 때문에 점점 얼어붙어 나중에는 조그마한 발가락이 맞붙어 버린다.』
이렇게 찾아온 삶의 터전을 피땀 흘려 새로 가꾼 한국 이주민들은 학교 등 모임이 있을 때면 집회 장소 한가운데 긴 나무 막대기를 꽂아 태극기를 달아 매 놓고 『동해물과 백두산…』을 부르고 고향에서의 풍속과 예의 범절을 그대로 지키고들 있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서는 간도를 찾아오는 이주민이 부쩍 늘었다.
1919년 당시 북간도에 한국인의 총수는 25만명 가까이 되었으며, 중국인은 8만 여명, 일본인은 겨우1천여 명에 불과, 용정은 북간도에서 한국 사람의 마을로 차츰차츰 그 모습을 바꾸어 갔다. 후의 일이기만 용정에는 우리 나라 시골 장같이 장이 섰으며 장날에는 멀리 떨어져 힘겨운 농사일을 보던 아낙네까지 나와 오랜만에 서로 만나 그 동안에 밀렸던 이야기를 주고받는 등 이야기의 꽃을 피워 장날의 용정은 인심 좋고 인사성 밝은 흐뭇한 우리 마을 풍경을 낳는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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