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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7) <제자 이혜봉>|<제27화>경·평 축구전 (22)|이혜봉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일 축협의 천대>
명치신궁 대회의 제2차 선발전 결승에서 전관 동군의 선발「팀」이나 다름없는 전경응대와 싸울 때 이영민이 출전했다는 것은 바로 전 회에서 말한바 있다.
그런데 이영민의 출전에 대해 동경 유학생간에는 말이 많았다. 그것은 이영민이 「베를린·올림픽」에 가기 위해 후배를 제치고 「베스트」로 뛰었다는 얘기였다.
그 때 이영민은 28세의 제일 나이 많은 선수였다.
그는 경북 출신으로 원래 육상·축구·야구의 천재적인 선수였다.
워낙 발이 빨랐기 때문에 그는 「하프·백」을 보다가 이 명치 신궁 대회 때는 「라이트·윙」으로 뛰었다.
하지만 이영민은 나이가 많았고 임원 겸 선수인데다 야구 등 갖가지 운동을 하다보니 축구는 연습량이 없어서 「볼」을 「패스」해 주면 놓치는 등 실수를 많이 했다.
이를 본 유학생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중 성질이 급한 친구들은 이영민에 대해 『때려 죽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소란을 피웠다.
그들의 이야기는 나이가 먹었으면 선배답게 잘 하는 후배를 출전시킬 것이지 「베를린」에 가려는 욕심으로 「게임」에 나왔다가 실수만 하니 보기가 싫다는 것이었다.
하기는 이영민이 「베를린」에 갈 욕심을 안 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이미 34년에 야구의 일본 대표 선수로 뽑혔고 축구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었다.
6월의 제1차 선발 때는 국내의 실업 야구 대회 때문에 경축단의 주장인 그가 일본에 조차가지 않았을 정도였으니 알만한 일이었다.
그러했던 그가 2차 선발 대회에 적극성을 띤 것은 경축단의 우승이 거의 확실하고 이에 따라 일본 대표로 「베를린·올림픽」에 갈 수 있다는 전망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영민이 이렇게 망신을 당했나 하면 경축단이 경성에 돌아와서도 「베를린」에 가게된다
는 그 꿈 때문에 한동안 마음이 들떠 재미있는 얘기를 많이 남겼다.
그 대표적인 것은 정용수가 돌아다니며 친구들에게 한턱을 잘 낸 일이다.
우리가 명치신궁 대회에서 우승하니까 몇몇 선수에 대해서는 일본의 신문이나 전문가들이 잘 평해주고 그 앞날이 유망하다고 추켜 주었다.
그 중에 조일 「그라프」지는 「골·키퍼」인 나와 「풀·백」인 정용수를 만화로 그려놓고 막강의 수비들이라 칭찬했다.
사실이지 당시의 정용수는 「볼」을 잘 찼다. 그는 언제나 머리에 「포마드」를 자르르 바르고 나오는데 아무리 진흙탕에서 「게임」을 해도 머리는 헝클어지지 않고 「팬츠」도 흙탕하나 튀지 않게 깨끗했다.
그것은 절대로 「헤딩」을 하지 않고 「태클」도 잘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는 「헤딩」을 하지 않는 대신 높이 오는 「볼」을 발로 차는데 여간 잘 차는 것이 아니어서 일본의 전문가들을 놀라게 했던 것이다.
이 만화가 나자 본인이 좋아했음은 물론이고 주위에서 하도 추켜 주니까 선발은 다 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경성에 돌아온 후 그는 많은 축하 속에 술을 샀다는데 어느 만큼 샀는지는 몰라도 술을 얻어먹었다는 친구가 몇십명 되었던 것을 보면 어지간히 돈을 쓴 것 같다.
그러나 이런 기대는 한낱 꿈에 지나지 않았다. 당초 대 일본 축구 협회는 「베를린·올림픽」 파견 선발전을 3회에 걸쳐 실시하고 그 우승 「팀」을 중심으로 일본 대표「팀」을 구성한다고 발표했다.
그 3개 대회란 경성군이 우승한 전 일본 선수권 대회의 1차 선발전과 명치신궁 대회의 제2차 선발전, 그리고 일본의 동·서 학생 대항전의 3차 선발전이었다.
이 동·서 학생 선발전에는 경성군이나 조선 선수들이 참가할 수 없는 일본인만의 대회였기 때문에 그때 경성군은 1, 2차 선발전의 우승만으로도 많은 선수가 뽑힐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악랄한 일본 축구 협회 친구들은 3차 선발전의 결과를 중심으로 대표 선수를 구성했으니 조선 선수들이 거의 다 빠질 수밖에 없었다.
조선 선수들뿐만 아니라 같은 일본 선수들이라도 관서 지방 선수들은 2명만이 선발되고 대부분 동경 지방의 관동 선수들이 21명이나 선발되었다.
이는 같은 일본 선수들이고 관동과 관서의 수준이 거의 비슷했다 하더라도 일본 축구 협회의 주도권을 관동 지방에서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관서 지방은 소외됐던 것이다.
이 때 경성군 선수로 선발된 것은 정 선수에 김용식, 후보에 김영근 등 2명뿐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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