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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소설|윤병로 (문학 평론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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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이달의 창작계에서 큰 소득은 무엇보다도 채만식씨의 유고 중편 『소년은 자란다』 (6백65장)가 「월간 문학」에 햇볕을 본 일이다. 1949년에 쓰여진 채만식씨의 말기 작품이고 최후 유작이기도 한 『소년은 자란다』가 발표되고 또 얼마 전 수필 유고 『한제수편』이 소개됨으로써 채만식 문학은 문단과 「매스컴」의 큰 화제가 되었다.
자칫하면 사장할 뻔한 이 소중한 문학 유산이 그의 아들 계열씨에 의해서 재발견됨으로써 채만식은 그가 세상을 떠난지 20여년만에 다시금 새롭게 각광을 받은 셈이다. 30년대의 유수한 작가로 지목되는 그는 두드러진 해학과 풍자로 그의 문학적 특징을 빛내고 있다. 그에 대한 생시의 평가는 대단한 것이 아니지만 최근에 우리 문단에서 해학 문학에 대한 새로운 관심도와 함께 그의 문학은 「하이라이트」를 받게 된 것이다.
『소년은 자란다』에서는 이 민족의 짓궂은 수난사가 참으로 「리얼」하게 재현된다. <우리는 무식하고 가난하였다. 가난하기 때문에 만만하였다.>
이 만만한 주인공이 흘러간 곳은 중국 간도이다. 여기서 자란 소년은 바로 「영호」였다. 8·15 해방과 함께 영호네는 고국으로 벅찬 발을 옮겼지만 갖가지 참변을 겪어야 했다는 것.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이 소설의 역사적 배경이 되고 있는 일제의 암흑기와 해방 후의 혼란상이다. 『탁류』의 작가 채만식은 전 17장으로 된 『소년은 자란다』에서 다시 한번 풍자 문학의 관록과 역량을 과시한 것이다.
여기서 현역들의 창작계로 시야를 옮겨본다. 우선 오영수씨의 『망향수』 (신동아) 와 강용준씨의 『어머니』 (월간 문학)에 대해서 주목하게 된다. 두 작가는 서로 다른 소재와 사건을 취급했지만 지극한 향수에 젖으면서 상실되어 가는 인정을 다시 일깨워 줌으로써 공감하게 된다.
『망향수』에서는 농사꾼 할머니가 늘그막에 사장이 된 큰아들 덕분에 서울에서 호강을 하지만 걷잡을 수 없는 고독 속에서 망향을 절감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영수씨의 모든 작품이 그렇듯이 버림받은 인간에 대한 따뜻한 동정이 작품 분위기를 감싸고 있다.
여기에 비해 『어머니』는 생사조차 알 수 없는 북녘의 어머니를 꿈속에서 그린다는 것. 중요한 것은 타향살이에 짓눌린 현실 속에서 어머니의 부재를 참으로 어둡고 황량하게 느낀다는 점이다. 이산 가족에 대한 집념으로 풀이되는 『어머니』는 작가의 정신적 갈등의 소산이다. 강용준씨의 작품은 언제나 그 스스로가 생생한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함으로써 독자에게 더 가깝게 접근할 수 있었다.
다음에 화제가 되는 것은 하근찬씨의 『모일 소묘』 (신동아)이다. 최근 악덕 의사를 고발하는 「매스컴」의 목소리와 동조되는 소설이다. 또 하루 동안에 겪은 작가의 체험 기가 생동하게 부각되었다. 만삭이 된 아내 그것도 심한 하열로, 진통하는 위급 환자를 새벽부터 이끌고 이 병원 저 병원 헤매다가 천재일우로 구출한다는 사연이다.
동네 병원에서는 <만약의 경우 자연 분만이 안 되면…> 때문에 거절되고 적십자 병원에서는 <과장님이 요즘 출장 중이시라…. 급히 수술을 하기가…> 란 이유로 쫓겨났다는 것. 종당에 찾아간 것은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 여기서도 피 값과 입원비 때문에 발을 구르며 다급했던 작가의 신변이 너무도 각박하고 처참하게 고백되고 있다.
다음에 시선을 끈 것은 박태순씨의 『재채기』 (월간 중앙) 이다. 『외촌동 사람들 13」』이란 부제가 붙은 소설이다.

<내가 이 글의 제목을 『재채기』라고 한 것은 이유가 있다. 내 하고 싶은 이야기가 꼭 재채기의 성미를 닮았다. 마음속이 간질간질해져 재채기처럼 울컥 쏟아놓고 것이었다.>
이런 해설이 전제된 『재채기』에서는 경찰서 보호실에서 겪었던 코고는 영감쟁이와 길거리에서 만나 잠시 동거했던 정월이란 아가씨를 대할 때 재채기 비슷한 것을 느꼈다는 얘기다. 이 작품의 「에필로그」는 그 사연을 좀더 선명히 해준다.

<이 세상을 향하여 더욱 시시하게 조건을 붙이는 세상에 대하여 재채기를 하고 싶어서 말이다.>
이 소설의 구도는 몹시 상징적인 수법에서 다루어졌지만 딸꾹질과 재채기는 단순한 생리적 현상에 그치지 않고 오늘의 사회 현실에까지 확대해서 체험된다는 것이다.
한편 박시정씨의 『이세의 고백』 (현대 문학)은 재일 교포 2세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있다. 이른바 <반쪽발이>로서 비애를 음양으로 겪으면서 성장한 「노부오」(김신응)는 차차로 민족 의식을 되찾게 된다.
그러나 반 허리가 난 모국을 방문하고 난 「노부오」의 민족 감정은 더욱 착잡하게 얽히고 걷잡을 수 없는 회의에 빠진다. 『이세의 고백』은 60만 재일 교포의 신음하는 목소리를 생생히 담고 집약했다는 데서 문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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