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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눈, 검은 얼굴 노숙인들

중앙일보

입력

지난달 27일 새벽 서울 지하철 6호선 이태원역에서 미국인 노숙인 스몰 에이(49)가 잠을 청하고 있다. [장혁진 기자]

서울 기온이 영하 4도까지 떨어졌던 지난달 27일 0시30분. 군복 차림에 검정 가방을 멘 중년의 흑인 남성이 서울 6호선 이태원역 안으로 들어섰다. 주변을 살피던 그는 곧바로 역 구석으로 가더니 담요를 꺼내 몸을 덮었다. 발걸음을 재촉하던 시민들도 그 장면이 신기한 듯 힐끔힐끔 곁눈질을 하며 지나갔다. 이름을 묻는 기자에게 그는 “스몰 에이”라고 한 뒤 입을 닫았다. 에이는 이태원동 일대에서 ‘흑인 노숙인’으로 통한다. 인근 주민들은 “지난 9월부터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그의 모습이 자주 보였다”고 전했다. 이태원에서 옷가게를 운영하는 이재숙(55·여)씨는 “최근에는 고물을 줍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태원역 신희웅(44) 부역장은 “기온이 영하권으로 떨어지자 바깥보다 역 안에 그가 머무르는 날이 많아졌다”고 했다.

 서울에서 노숙하는 외국인이 늘고 있다. 네덜란드 국적의 노숙인 B(83)는 지난 5월 서울역 시계탑 앞에서 경찰에 발견됐다. B는 한국전쟁 참전용사라고 주장했다. 정신이상 증세를 보여 지난 7월 대구에 있는 요양시설로 보내졌다. 하지만 며칠 뒤 다시 서울역으로 돌아와 최근까지 노숙을 했다. 지금은 건강이 나빠져 적십자병원 희망진료센터에 입원 중이다. 지난 3월엔 서울 용산구 인정복지관으로 독일인 C(53)가 찾아와 먹을거리를 요구했다. C는 복지관에서 며칠간 지내다 다시 거리로 나갔다. 복지관과 경찰에 그의 행방을 수소문했더니 “어디서 지내는지 모른다”는 답이 돌아왔다.

 1일 외국인 노숙인 임시(일시)보호시설인 서울특별시립 ‘다시서기종합지원센터’에 따르면 올 들어 9월까지 이 센터에 접수된 외국인 노숙인의 상담 건수는 8건이다. 지난해엔 한 건도 없었다. 상담을 받으러 온 노숙인들의 국적은 미국·캐나다·러시아 등으로 다양하다. 여재훈(45) 센터 소장은 “현재 서울의 임시보호시설 4곳에 60명이 머물고 있다”며 “서울만 해도 파악되지 않은 노숙인들이 더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안산 다문화가족행복나눔센터에 입소 대기 중인 외국인 노숙인 29명의 상담 사례를 분석한 결과 ▶어학연수 등으로 입국했다가 경제적 원인으로 노숙생활을 시작했다는 사람이 13명(44.8%) ▶가정불화 5명 ▶비자만료 3명 ▶난민 2명 등이었다.

 하지만 외국인 노숙인들은 국내의 노숙인 복지시설에서 제대로 보호받기 어렵다. 관련 규정이 마련돼 있지 않아서다. 임시보호시설을 제외한 일반 노숙인 쉼터와 자활시설, 요양시설은 내국인만을 대상으로 한다. 외국인이 머물 수 있는 임시보호시설은 전국적으로 8곳밖에 없다. 그나마 보호기간 20일이 지나면 시설에서 나가야 한다. 외국인 노숙인에게 쉼터와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민간단체가 있긴 하나 손에 꼽을 정도다. 지구촌사랑나눔 김해성 대표는 “노숙인 시설이 내국인을 수용하면 정부보조금을 받지만 외국인 노숙인은 보조금 지급대상이 아니다”며 “대부분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고 전했다. 보건복지부 자립지원과 관계자는 “국내 노숙인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외국인 노숙인까지 신경 쓰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법무부 외국인정책과 관계자는 “외국인 노숙인이 합법적 체류자인 경우 출입국관리법 위반이 아니기 때문에 본국으로 돌려보내기도 어렵다”며 “임시보호시설이 외국인 노숙인을 의무적으로 보호하게 하는 방안 마련을 보건복지부와 협의 중”이라고 설명했다.

 선진국에서 외국인 노숙인 문제는 심각한 사회문제다. 지난해 프랑스 통계청은 “약 14만 명의 프랑스 노숙인 중 58%가 외국인”이라고 발표했다. 스웨덴 극우 정당인 민주당은 지난달 7일 거리에서 구걸하는 외국인 노숙인들을 교도소에 가두거나 추방하자고 제안했다. 숙명여대 김영란(사회심리학과) 교수는 “외국인 노숙인 문제를 방치해두면 새로운 사회문제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며 “외국인 노숙인도 기존 노숙인 복지시설에서 보호받을 수 있도록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장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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