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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십자회담의 생방송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30일 평양 대동강회관에서 열렸던 적십자 본 회담은 남-북 수석대표들로부터 각기 양측의 기본입장을 밝히는 연설이 있은 다음, 첫 본 회담의 의제에 관한 합의문서 교환이 있었다.
이 합의문서에서 양측대표는 7·4 남-북 공동성명의 정신과 인도주의적인 적십자 정신에 입각, 흩어진 가족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노력에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하면서 예비회담에서 합의한 본 회담 의제를 재확인했다. 그러나 합의문서 서명에 앞서, 북적 측은 난데없이 예정에도 없던 북한의 노동당 이하 8개 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의「축하연설」을 듣자고 주장하여 장장 1시간 반에 걸친 이들의 정치연설이 행해졌다.
이상과 같은 회담 진행상황은「대한민국신문·통신공동취재단」의 이름으로 평양으로 부터 전파「미디어」를 통해 대한민국 전역에 그대로가 생으로 중계방송 되었다. 적십자 본 회담 개최와 더불어 우리 국민들 가운데에는 북한의 강산이나 사회가 과연 어떻게 변했을까 하는 호기심 때문에도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므로 현지에서의 회담진행상황을 신속 정확하게 전국에 보도 전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요, 또 이를 위해 우리의 발달한 전파「미디어」가 동원되었다는 것은 자랑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평양으로부터의 방송보도가 본래의 합의사항을 어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적십자회담과는 아무런 직접적 관련도 없는 북한 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의 연설, -공산주의「이데올로기」선전의 냄새를 강하게 풍기고, 또 북한 공산당의 업적을 극구 찬양하고 있는 연설을 그대로 생방송으로 우리 국민에게 전달해준 데 대해서는 실로 아연질색을 금치 못한다. 왜냐하면 비록 적십자회담을 취재하고 보도하는 것이라 하지만, 남북은 여전히「이데올로기」 와 체제상의 이념적 대결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일진대, 결과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의 정치적인 선전연설을 대한민국의 모든 방송국이 공동으로 중계방송 해주었다는 것은 이 이념적 대결 내지 심리전을 벌이는 도중 우리에게「마이너스」를 준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북한의「매스·미디어」는 적십자회담을 취재 보도함에 있어 분량을 매우 적게 할당하고, 또 공산당이 노리는 심리 작전상 교과에「플러스」가 되는 것만을 골라 대중 전달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한 일인 것이다. 이와 비교해 볼 때 우리의「매스컴」이 무원칙에 가까운 개방자세를 취했다는 것은 민심에 미치는 갖가지 영향과 심리전상의「마이너스」작용의 면으로 보아, 돌이킬 수 없는 국가적 손실을 준 것이라 규정치 않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국가의 생명은 유한한 것이지만 민족의 생명은 영원한 것이요, 적십자회담은 바로 그러한 민족의 생명을 지속하고 보전하는 요구에서 나온 숭고한 사업이기 때문에 그 회담의 진행상황의 보도도 국가적인 제약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할는지 모른다. 이런 주장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남-북 분단대립 27년의 가혹한 역사적인 현실을 고려할 때, 우리는 적십자회담이나 그 회담 장 주변을 취재 보도함에 있어서도 우리의 국가안전을 절대로 소홀히 할 수 없다고 확신한다.
현대국가의 성격으로 보거나, 또는 지금 남-북간에 벌어지고 있는 정치전쟁·사상전쟁의 성격으로 보거나 사상안보가 국가안보 중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은 구차스러운 설명을 필요치 않는다. 그런데 불행히도 우리 국민의 정치의식 수준은 비교적 낮다고 할 수밖에 없으며, 때문에 공산주의에 대한 면역성은 여전히 충분한 것이라고는 하기 어렵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모든「매스·미디어」가 다 그렇지만 특히 전파 「미디어」의 파괴적 영향력은 지대한 것이므로 북한 당국자들의 계산된 정치적 발언을 여과하는 과정 없이「라디오」·TV 등이 직접 생방송 함으로써 생기는 국민의식상의 혼란을 막기 위해 앞으로는 보다 신중한「스크리닝」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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