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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 문화교류의 한 방안|김정주씨<재 일민 단장>발표…영남대통일문제「심포지엄」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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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영남대 통일문제연구소는 17∼19일 서울 「아카데미·하우스」에서 「남북한간의 기능적 융합」을 주제로 한 통일문제「심포지엄」을 갖고있다. 이 「심포지엄」에서 김정주씨(재일 거류민 단장·한국사료연구소장)는 『재일 동포의 남북문화교류-추진 중에 있는 실력방안』을 통해 일본을 통한 남북한의 문화교류의 가능성과 그 필요를 역설했다. 다음은 그 요지.
일본은 조국과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위치에 있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동양사회에서 가장 국제성을 띠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중요한 나라다.
여기에 60만의 동포가 경계 없는 동일 판도 안에서 남북인사들이 본국보다 용이하게 접촉할 수 있는 실점에 있다. 종전처럼 적대관계로 대립을 지속한다면 극렬한 충돌을 피할 수 없으나 융합관계로 교류가 이룩된다면 지극히 효과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교포사회에서 우선 비정치 교류, 이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으로 중요하고 또 타산적으로 하등의 이해가 없는 문화교류로부터 시동될 것이 극히 요망된다.
남북문화교류는 적십자회담이후 우리정부가 발표한 인도적 문제·비정치 교류·정치협상이란 단계적 해결방식의 제2단계이며, 「남북공동성명」제3항 다면적인 제반교류에 속하는 것이다.
조속한 문화적 교류의 실현을 기대하면서 남한이 조급히 알고싶은 북한의 문화재 또는 학술 면의 몇 개 실례를 참고로 들어본다.
▲청동기시대 유물=김원용 박사의 『한국고고학개론』은 해방 후 북한지역에서 철기시대에 앞서 청동기시대유적이 발견돼 한국에 청동기시대가 존재했었다고 주장하는 북한 학자들이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을 통한 단편적 보고에 의한 것이었다.
북한학자들은 청동기 시대문화가 BC20세기전반에 시작돼 신석기문화를 계승했다고 한데대해 한국학자는 그 시기가 북에서는 낙랑 시대, 남에서는 초기철기시대나 김해시대보다 앞선 것은 사실이라고 보고있다.
해방 후 북한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 유적·유물은 이렇게 전해온다. 즉 평양시사동구 금탄리의 청동기시대 주거지와 끌, 평북 용천군 신암리 즐목문 토기와 석기, 함북 나진군 초도의 방울·가락지, 함남 영흥읍의 부·창첨의 용박, 강원도 고성군 거진리 단검의 용박, 함북 경성군 삼봉의 장신구의 용망 등이 그것.
청동기유적은 북한의 광범한 지역에 걸쳐있으나 남한에선 충남 대전지구, 전남 한암 지구·화순지구에 국한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 나라 청동기시대 생활풍습과 사회구조를 밝히기 위해서 이들 유적·유물에 관한 남북교류가 요구되는 것이다.
▲안악 벽화고분군=1949년 황해도 안악에서 거대한 벽화고분들이 발견됐는데 그중 원형대로 남아있는 3고분을 안악1·2·3호 고분이라고 불렀다. 이 사실은 다행히 발굴에 참여했던 채병서씨가 「백산학보」에 밝힘으로써 남한에도 알려졌으나 일반은 아직도 잘 모르고 있다.
가장 큰 제3호 고분은 묘지명에 연기와 「동수」라는 인명이 있어 이것이 AD357년에 만들어진 「동수」또는「미천왕」부부의 묘로 주장되고있다.
고구려시대 지배계급의 기거양식과 반 서민의 생활풍습을 생생히 나타내고 등장인물만도 2백50여를 헤아리는 이들 고분벽화는 풍부한 연구자료를 제공하는 것이나 아직 묘주의 비정 조차 분명치 못한 채로 여러 의문점을 내포하고 있다. 이에 관한 상세한 사진자료와 정확한 보고가 빨리 접해져야겠다.
▲광개토왕릉비=고구려 19대 광개토왕의 릉비인 이 호태왕비는 지금 중국령 집안에 있다. 해방 전엔 이 비문의 척 본에 대한 진위에 의문을 표하는 사람이 없었다. 60년대에 와서 김석형 박시형 등 북한학자들의 연구로 과거 일본에 반입된 척 본이라는 것이 일본군인의 흉계로써 교묘하게 개작된 것이고 또 일본육군 참모부의 의도로써 오독 되어 왔다는 놀라운 사실이 판명되었다.
광개토왕릉비의 탁본은 1884년 일본에 전해졌는데 1879년 청일 개전 전에 일본 육군참모 본부의 파견장교 주구경신대위가 비문에 석회를 입히고 척 본을 작성, 일본 대화세력이 전국을 통일하고 이제는 대륙진출을 꾀한다는 의도를 역사에서 밑받침하려 들었다.
이에 따라 횡정충직·관정우·나가통세·길전동오 등 학자들이 일본이 한국을 지배했다는 역사왜곡에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전후에 이르러 수곡 제2랑은 비문의 탁본이라는 것들을 모조리 비교연구, 일인들이 개찬 할 수도 있다는 주장을 처음 내놓았던 것.
이를 계기로 북한학자들과 일본의 진보적 학자들 중 촌명·좌백유정 등의 연구가 이를 밑받침했다.
물론 남한에서도 구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에 이르는 유적들과 백제 무열왕릉, 신라 문무왕 해중릉 등 고령·거창·영주·한강변 벽화고분과 부여의 사택지적비, 월성 설총 유적비 등이 새로 발견돼 역사연구에 커다란 진전을 보였다.
▲일본 명일향촌의 고송 총=지난 3월 이 고분이 발견되어 일본을 떠들썩하게 했으나 이것은 당이나 고구려의 영향이라고 학자들이 주장, 한·중·일 학자들의 공동연구가 준비되고 있다. 한국은 여기에 적극 참여해야 할 것이다.
결국 일본에서 추진중인 남북문화교류의 실시방안은 ①남북문화인의 상호접촉 ②문헌·자료의 상호교환 ③한·일 양국의 공동연구 ④일본측식민사관의 합력시정 ⑤모작전시관의 설치를 통한 남북문화의 소개 등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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