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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한자 독후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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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비」자는 『계집종 비』라고 읽는다. 하녀·천녀 등이 포함된다. 여자가 자기를 낮추어 일컬을 때도「비」라고 한다. 평등 시대와 함께 「비」자는 시대소설에나 쓰일까, 그렇지 않고는 별로 쓸모가 없다. 속칭 오늘의 「식모」라도 「비」라고 했다가는 봉변을 면치 못할 것이다. 또 굳이 자기를 낮추어「비」라고 할 여자도 없다. 시대가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 중·고교생이 하필이면 이 죽은 글자를 익혀 두어야 할 필요가 무엇일까.
「희」자도 일상단어의 용도에선 일반성이 별로 없다. 『광희 몇 년』하는 데나 쓰일까. 물론 고유명사에선 빈번히 쓰이고 있다. 따라서 기초한자의 틀 속에 넣지 않아도 좋을 뻔했다. 고유명사는 예외로 한다는 규정이 있는 바에야-.
종·형·매·주·요 등의 글자는 상식일까 아닐까? 기초한자에선 이들이 빠져있다.
기초한자를 제정하는 것은 한자문화와의 단절감을 없애는데 큰 뜻이 있다. 이때의 「한자문화」란「죽은 문화」가 아닌, 「살아있는 문화」를 두고 하는 말이어야 한다. 따라서 한자교육은 「한문」교육과는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만일 「한문교육」을 뜻하는 것이라면 대 혼란을 면치 못할 것이다.
우리가 한자를 익혀야 할 필요는 반드시 「한 문장」을 읽는 용도만은 아니다. 일상 속에서 우리의 언어로 쓰이고 있는 단어가 한문화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는데 그「필요성」이 있다. 기초한문은 당연히 그 일상성이 전제조건이다.
이번 우리의 기초한자 선정은 일본의 상용한자와 미 「예일」대의 그것이 참고되었다고 한다. 일본의 당용 한자는 더러 유사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예일」대의 경우, 우리의 생활 어와 얼마나 깊은 연관이 있을지 의문이다. 용도와 목적이 같지 않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제 한자시비는 그만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실무자들도 앞으로 필요와 유용성에 따른 조정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단서를 달고 있다. 당연히 그렇다. 이 지상에 존재하는 한자가 4만 여자나 되고 보면 논리상 4만 가지의 주장도 있을 수 있다. 그 중에 1천8백자를 가려내는 일은 사실 어렵다. 또 4만 가지의 주장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을 논리 정연하게 받아들이는 일은 그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각계 권위자들도 대부분 긍정적이다. 한글전용이 한자 추방으로 변질되었던 그 모순이 해소된 것만 해도 크게 다행이다. 이제 우리의 문자정책은 안정기를 맞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 동안의 문자방황은 공연한 「공백문자」시대를 겪게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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