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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7)<제26화>내가 아는 이 박사|경무대 사계 여록(164)|윤치영<제자 윤석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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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 박사의 민주의원으로 하여금 비로소 한국은 독립전취의 국제무대를 열고 나가게 됐다. 임정과 독립 촉성회와 기독교계를 제외하고는 모든 국내정당·사회단체들이 미·소 공위의 소위조선민주주의 임시정부와 「하지」의 입법의원이 좌우합작에 권력의 초점을 맞추고있는 무렵이다. 민주의원과 더불어 이 박사는 비상국민회의란 것을 구성하고 국회라고 호칭하도록 하였다. 행정부와 입법부를 형식으로나마 갖춘 셈이다. 그래서 초기에는「하지」에게 건국준비의 책임권한을 이 두 기구에 넘겨줄 것을 종용설득 했었고「하지」도 「맥아더」장군에게 이러한 이 박사의 요청을 협의한 일이 있다.
「맥아더」장군은 일본문제로 해서 이미 미·영·소의 「모스크바」3상 회담을 반대한다고 성명 하였었다.
그래서 「맥아더」는 미국 조야로부터 대소전을 준비하는 위기인물이라고 지탄받기도 했다.
소련은 한국전체를 희망했을 뿐 아니라 일본에도 연합국이사회를 두어 공동관리하자고 제안하고 3상 회담에서 결정케 한 것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맥아더」장군의 성명은 미국의 여론에 부닥쳤다.
한국에서도 「하지」의 최고정치고문으로 새로 온 「굿펠로」가 이 박사에게 미국정책을 설명회유하기 위하여 이 박사의 지방순회를 따라 다니기도 했다. 민주의원과 비상국민회의에서도 한편으로 미국정책에 순응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하여 표면상 미·소 공위에 적대하지 않는 것처럼 태도를 취했다.
미·소 공위가 6호·7호를 발표하면서 국내의 정당·사회단체의 동조를 받아 무르익어 가자 이 박사의 예견은 적중하여 들어갔다. 소련 측에서 반탁 파를 일체 미·소 공위의 협의대장으로부터 배제해야된다고 나온 것이다. 박혜영·여운형 등의 공산당과 인민당만이 임시정부를 세울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이미 이 박사는 1개월 전에 한민족은 강제공산화에 대항한다고 선포했었다. 소의 반탁 진배당 주장은 마침내 미·소 공위를, 무기한 휴회로 몰고 들어갔다. 미국이나,「하지」의 기대가 어리석었다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46년8월에 들어서자 이 박사는 임영신을 불러 자주 이야기했다. 임영신의 도미는 순수하게 그의 중앙여자전문학교관계라고 믿고 있었다. 그가 이 박사의 지시를 받고 민주의원의 전권대사자격으로 「유엔」에 파견되었다고 생각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를 보내고 나서 바로 이 박사는 미국과 소련에 대하여 「얄타」밀약과 3상 회담을 철회, 취소하라고 성명하고 서한을 보냈다. 「워싱턴」에서 구미 위원부를 그대로 맡고 있던 임병직도 때를 같이하여 「번즈」국무장관에게 이 박사의 주장을 요구했다.
동경의 「맥아더」사령관은 좌우합작의 가능성이 없다는 것과 미·소 공위에 의한 임시정부가 실현성이 없다고 월례보고를 했다. 이 박사의 임영신 파견은 시기 적절했던 것이다.
「하지」는 조급해지자 김두봉 등의 공산세력과 접촉하여 빠져나갈 길을 모색했으나 모두 무모하고 무의미했다.
미주의 임영신은 미국무성과 각국의 「유엔」대표들을 설득하는데 진력하였다.
그의 호소에 감동된 고「루스벨트」대통령의 부인 「에레나」여사의 주선과 「필리핀」의 「유엔」대사 「로물로」박사(현 외상)와 「리비아」공화국대표를 우리는 잊을 수가 없다. 임영신은 이들의 후원과 보장으로 한국대표로서「유엔」을 뚫고 들어간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10월에 들어서 임영신은 「유엔」에 제소하는데 성공하였다. 「유엔」의 사무 총장 「리」씨는 한국민주의원의장 이승만의 서신을 정식절차로 접수했다.
이 박사 서신의 골자는 세 가지였다. ⓛ한국의 독립자유, 강대국의 「카이로」「포츠담」선언이행 ②미·소 양군철수 ③한국의 임정(민주의원)을 「유엔」에서 인정 후원하라는 것이었다.
이 박사는 「하지」의 맹렬하고 교활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유엔」총회에 출석 차 건너갔고 한국문제는「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 제출되어「매스컴」을 타고 세계의 여론이 되기 시작했다. AP등의 모든 보도에서는 이 박사의 호소를 들어 한국은 독립되어야한다고 주장하고 미·소 양군의 철수를 내세웠다.
「유엔」위원한국 파유안이 4l대0으로 가결되었을 때 이 박사는 『70년간 묵은 체증이 비로소 내려갔다』고 감읍을 참지 못했다. 임영신은 만2년간을, 이 박사의 엄명을 민족의 사명으로 인식하고 그의 집안재산을 털어 건국의 감초를 세웠다.
임영신이 「유엔」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안 민주의원은 내가 맡아서 해나가야 했다. 이 박사의 병환이 짙었고, 모든 정치세력으로부터 수모를 한 몸에 받는데다가 좌계의 「테러」를 감당하기가 어려웠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하지」의 민주의원 해체지시를 일선에서 저지해야 했다. 이 박사는 끈기 있게 웃음으로 「하지」를 물고 늘어져야 한다고 병중에도 간곡히 나에게 지시했었다.
당시의 주재천 검사가 나의 무기불법소지를 들어 구속하겠다고 수도청장 장택상에게 의논했었다. 장택상은 백만의 청년「테러」가 그의 뒤에 있으니 알아서 하라고 충고했었다.
그러나 「하지」는 민주의원의 겨냥을 받으면서도 나와 친근했다. 「록펠러」3세 등 미국친구들의 성원도 있었고, 충고도 있었지만 이 박사의 정략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민주의원은 미군정 청의 회의실에서 발족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예식 상으로는 미군정에서 직접 만든 셈이다.
한가지 「아이러니」한 것은 민주의원 수호를 위한 전국적 활동의 기금이 「하지」부하의 협조에 의해서 조달되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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