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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절 27년」잇는 「대화의 다리」를 놓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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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수고 많았습니다』-. 단절 27년의 남·북 장벽에 도전한 첫 주자 예비 회담 대표 5명이 대화의 정초 작업을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본회담 대표들에게 「바통」을 「릴레이」하게 됐다. 불신과 비우호를 인내로 극복하고 여망의 결실을 맺기까지 지난 1년은 이들 5명에겐 가슴 죄는 살얼음판이었다. 김연주 수석 대표는 『악어가 웃을 때는 정말 웃는 것이냐, 물어뜯으려는 것이냐』는 「처칠」의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 북적의 속셈을 꿰뚫기 위해 전신경을 곤두세웠다고 했다. 『마주 대한 5명을 김일성 5명으로』 쳐 놓았기 때문에 능란한 파안 작전을 펴 올 땐 꿍꿍이속을 몰라 사실 조심스러웠다고 털어놓았다. 이 같은 팽팽한 긴장은 취미 생활에 까지 연장. 특히 김 수석은 『동년배 중 나보다 센 사람은 아직 못 봤다』고 자랑할 만큼 호주가 이지만 지난 1년은 조심스러워 『목을 축이는 정도로 절주했다』고. 외교관 출신 김태희의 장광설을 만나면 『김 단장 과열하셨어』로 김을 빼는 등 「아마」답잖은 적시타도 곧잘 날렸다.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중2 꼬마(모 경찰서장 아들)에게 붙잡혀 「사인」을 해주고 받은 『아저씨, 꼭 성공하셔요』라는 격려를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언제나 화기로 회담장을 부드럽게 해 온 박선규 교체 수석 대표도 의제 토의가 교착, 똑같은 소리만 되풀이 될 땐 심한 좌절감마저 들었다고 했다. 발언할 기회는 별로 없었지만 혹시 깨지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과 긴장이 겹쳐 나중엔 땀이 나 『바지 가랑이를 흥건히 적시기까지 했다』고 했다.
집이 대전이어서 회담 때마다 상경해야 하는 등 남달리 불편을 겪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짧은 인생 붙어살자』는 「부부 합의」에 따라 아내(허명희·47)를 꼭 동반, 「그레이·데이트」만은 실컷 즐겼다는 고백이다 .신문에 이름이 실린 덕으로 20년간 연락이 끊겼던 친구와 다시 만나게 되기도 했다.
회담 전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짜 온 「브레인」 정홍진 대표의 지난 1년은 실로 남다른 고충의 연속이었다. 어려웠던 고비는 북적안 중 친우와 정당·사회 단체 대표 초청 문제를 삭제, 보류하고 면회소 설치의 한적안을 관철시킨 것. 그러나 이 같은 대외적 난관보다 북한에 완승을 바라는 대내적 감정 조절이 더욱 어려웠다는 실토였다. 회담은 상대방이 있기 때문에 최소한 북적도 설 땅을 인정해줘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왜 KO를 안 시키고 왔느냐』 『말려들어 간 것이 아니냐』는 등 뜻밖의 화살을 받기가 일쑤였다는 것이다.
설득을 피하고 끈질기게 회담의 의미를 바로 평가하도록 북적을 유도한 정 대표의 작전이 결실을 거둔 밑거름인지도 모른다. 앞으로의 본회담은 조절위와의 함수 관계로 풀이, 조절위가 정치적 의미를 어느 정도 흡수하느냐에 따라 회담의 진도가 좌우될 것으로 내다봤다.
『어떻게 하면 이해할 수 없는 저 사람들을 이해하고 나를 이해시킬 수 있을까』-. 분단은 외국의 책임도 크지만 우리 자신의 옹졸·편협 때문에 굳어진 것으로 느껴 온 홍일점 정희경 대표는 속죄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회담에 임했다고 했다.
지난 겨울에는 신우염으로 입원했으면서도 주치의의 만류를 박차고 회담에 기어이 나가기까지 했다. 자연 집안 손질도 등한해져 『주부를 차압당했다』는 집안의 놀림을 받았다.
정주연 대표는 대변인·실무 회의 대표까지 맡은 1인 3역. 내신 30개사, 외신 33개사를 상대해야 하는 막중한 업무에 쫓겨 밤샘을 하기가 일쑤였다. 외신 기자들을 일일이 설복, 세계의 여론을 한적 주장에 귀기울이게 만드느라고 진땀을 뺐다.
『잇따라 걸려 오는 실향민들의 애 타는 문의 전화가 채찍질이 되고 있다』고 했다. 『죽은 후에 묘소라도 돌봐 줄 단 하나의 아들이 이북에 있다. 생전에 만나 볼 수 있겠느냐』며 왈칵 울음을 터뜨리는 노인네의 전화 등을 받고 보면 새로운 각오로 뛰지 않을 수 없었다는 얘기였다. <김형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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