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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Sunday] ‘섹시 마일드’의 추억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51호 31면

새하얀 수녀복을 입은 금발머리 여성이 “섹시 마일드”라고 읊조리는 샴푸 광고를 기억하시는지. 한때 만인의 연인이었던 배우 멕 라이언이 1997년 6월 한국에서 촬영해 인기리에 방송됐다. 문제는 라이언이 유명 토크쇼 ‘데이비드 레터맨 쇼’에 출연, “아시아 어느 나라에서 ‘섹시 마일드’라는 제품 광고를 찍었는데 대체 뭔 뜻이냐”며 깔깔 웃은 데서 불거졌다. 이 발언이 한국 언론에 ‘맹랑한 멕 라이언’(97년 6월 18일자 동아일보) 등의 제목을 달아 보도되자 라이언은 “한국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데 대해 사과한다”고 했다. 하지만 때는 늦었다. 광고는 바로 방송 중단됐고 해당 회사는 모델 계약을 해지했으며 당시 개봉한 그의 영화 ‘애딕티드 투 러브’는 흥행에서 실패했다.

해묵은 이 해프닝을 끄집어낸 이유는 최근 ‘로맨틱 머시룸’이라는 문구로 미국에서 진행된 한국 식자재 홍보 캠페인 때문이다. ‘낭만적 버섯’ ‘엄청난 미역’ ‘신나는 김치’의 뜻으로 만든 영어 문구는 국내외 외국인들 사이에서 웃음거리가 됐다, 중앙SUNDAY는 최근 외국인 한국통 5명을 초청해 대안 모색 좌담회를 열었다. 보도 이후 해외 문화홍보원은 이들에게 자문을 했다는 후문이다. 해당 홍보회사는 “광고 특성상 눈길을 확 끌어야 하기 때문에 일부러 그런 문구를 사용했으며, 현지에선 호평도 있었다”고 해명해왔다.

지면에 다 옮기진 못했지만 외국인 전문가들은 “한국인들의 영어 울렁증도 문제”라고 입을 모았다. 영어로 말하면 뭔가 멋있어 보인다는 생각에 영어 단어 몇 개를 조합해 제품 이름을 짓고 캠페인을 벌인다는 거다. 좌담회에선 “한국인은 왜 한국어를 낮춰 보냐”는 질문도 나왔다. 뒤집어보면 “한국인은 왜 영어를 떠받드나”라는 질문일 수도 있다. 그러다 보니 영어를 잘하면 부러움 혹은 질투의 눈초리를 받는다. 29일 밤 방영된 모 예능프로그램에서 배우 윤여정이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모습이 나오자 ‘윤여정 영어’가 곧바로 포털사이트의 주요 검색어로 등극했다. 영어는 괴물이 아니다. 잘한다고 잘난 척할 것도, 못한다고 주눅들 것도 없다. 미국이 무조건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활용의 대상이듯, 영어도 그렇지 않을까.

‘토종 한국인이 영어에 대해 뭘 안다고?’라는 말이 들려오는 것 같아 노파심에 몇 자 설명하자면 기자는 만 8년간 코카서스인 에디터들에게 대체로는 혼나고 때론 설전을 벌이며 영어로 기사를 썼다. 해외로 가는 비행기를 처음 탄 건 입사 후 첫 여름휴가 때였다. 이것도 잘난 척이라면 민망하지만. 어쨌든 영어 못한다고 주눅들 것도, 괜한 열등감을 가질 것도 없다. 다신 ‘낭만적 버섯’과 ‘와우! 시흥’을 보고 싶지 않은 평범한 대한민국 시민으로서 감히 적는다.

마지막 한마디. ‘섹시 마일드’라는 샴푸 이름은 대체 무슨 뜻일까. 진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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