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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서울 백련사 엄나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해마다 6, 7월이 되면 한 그루 엄나무 꽃향기가 백련사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321) 1만5천여평의 널따란 경내를 메운다. 엄나무는 흔히 부르는 이름으로 해동목.
수령 4백60여년. 높이 약 20m, 밑줄기 둘레 3m30㎝, 굵은 가지만 50여개 되는 거목이다.
백련사 입구에서 본당 쪽으로 1백m쯤 들어가면 오른쪽 길가 언덕배기에 우뚝 솟은 자태가 의연하다. 그러나 변함없는 모습에 비해 거목은 해가 갈수록 외롭기만 한 것 같다.
언제부턴가 팔·다리·허리가 쑤시는데 엄나무가 특효약으로 알려져 몰지각한 주민들에 의해 전국 엄나무는 마구 잘리고 있으며, 지난해에는 근처에 있던 3백년 묵은 한 그루가 뿌리째 뽑혔다.
원래 엄나무는 장마철에 꽃피기 때문에 채 종이 어렵기로 이름나 있다. 제일 잘 열매를 맺는다는 백련사 엄나무도 열매가 땅에 떨어지자마자 장마에 휩쓸려 모래내 쪽으로 흘러가 근처에 3∼5년 되는 어린 손자 5그루 정도 있을 뿐이다.
이 나무의 후손은 거의 끊기고 있지만 엄나무에 얽힌 전설은 백련사 스님들의 입을 통해 지금도 생생하게 전해오고 있다.
햇볕 따가운 어느 여름날이었다. 이조 제7대 임금 세조의 딸 의숙 옹주를 태운 가마가 백련산 중턱을 오르고 있었다. 17세 때 시집간 옹주는 5년만에 신혼의 단꿈도 깨기 전에 낭군을 잃고 22세에 청상과부가 됐다. 재가할 수 없는 것이 당시 왕가의 법도. 슬하에 자식이 없었던 옹주는 출가하여 불교에 귀의하기로 결심, 정토사 경내 (현 백련사 전신) 백운암에 가는 길이었다. 그 길로 산사에 묻히면 영영 속세와 인연을 끊게되는 신세. 옹주는 산중턱에 오르자 갑자기 물을 마시고 싶다고 앞장선 스님에게 말했다.
샘물이 없어 당황하는 종자들에게 스님은 주장자 (지팡이)로 돌 틈을 가리키며 파 보라고 했다. 신기하게도 샘물이 졸졸 흘러나왔다. 그때 생긴 샘물은 지금도 장마나 가뭄을 타지 않고 수량이 한결같이 풍부하다.
답답한 가슴을 축인 옹주는 백련암 입구에 있는 엄나무 밑에서 잠시 가마를 멈추고 쉬었다. 궁중의 영화와 달콤했던 신혼 생활, 망부의 사랑 등 속세의 인연을 생각하며 번민하던 옹주는 가시 돋친 엄나무를 바라보는 순간 대오 각성하게 됐다.
『산 속에 홀로 섰는 나무도 이렇게 가시로 엄한 보신책을 마련하고 엄하게 살아가는데…』 옹주는 불가에 몸을 맡기고 몹쓸 병에 고생하는 아버지 세조를 위해 기원하며 살아갈 결심을 새롭게 했다는 것이다.
이후 백운암은 백련사로 승격했고 엄나무는 귀신도 못 붙는 나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엄한 영목으로 스님들의 보호를 받아 왔다.
기록에 의하면 정토사는 신라 경덕왕 6년 (서기 747년)에 세워진 고찰. 의숙 옹주가 이곳에 들어온 때가 1570년대이므로 당시 줄기에 가시 돋친 정도면 이 엄나무는 60년 정도 됐을 것으로 추정, 지금은 4백60년이 넘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69년 인근 한 주민이 폐결핵을 앓는 외아들을 살리겠다고 엄나무 가지를 끊어간 일이 생겼을 때 여러 스님들이 주지 스님에게 집단 항의한 일이 있다고 운경 스님 (31·동대 불교학과 수료)이 말했다.
엄나무는 결이 단단해 가구나 그릇을 만드는 목재로 쓰인다. 특히 엄나무 바리때는 스님들 사이에 최고급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껍질과 뿌리·줄기 등은 신경통과 폐결핵 치료제로 쓰이고 어린잎은 쌈을 싸 먹는 등 식용으로도 쓰인다.
수백년을 지나온 엄나무는 해충을 타지 않아 지금도 푸른 잎새가 하늘을 덮어 40평 정도의 그늘을 드리우고 무엇인가 깨우침을 주려는 듯 푸르기만 하다. <김영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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