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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좀 가르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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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김동익
언론인·전 정무장관

백화점 근처에 약속이 있었는데 시간이 남아 책방에라도 잠시 들르려 했다. 혹시 백화점 위층에 올라가면 책방이 있느냐고 안내원에게 물었다. 대답은 이러했다. “책방은 없으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쪽으로 100m쯤 가시면 책방은 없으시고 서점이 계십니다.” 백화점·은행·병원·동사무소 등에서 직원들에게 친절하라는 교육을 한다. 그런데 말의 교육은 제대로 안 시키는 모양이다. “그런 물건 안 계십니다” “부탁한 서류 여기 계십니다” 등등 사람이 아닌 사물을 높이는 사물 존칭 사례가 사방에 넘친다. 이는 제대로 된 우리말이 아니다.

 젊은 직원들의 이런 말만 탓할 수도 없게 됐다. 지도 계층에 있는 사람들의 말도 엉망이다. 어느 헌법학 교수는 탈북자들을 모두 총살해야 한다는 글을 카톡에 올렸다. 그 말의 해명을 들어보니 어느 탈북자가 ‘선거부정 규탄’을 비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게 무슨 해명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또 어느 정치인은 박근혜 대통령을 가리켜 “애비와 딸이 똑같다”고 했다. “서점이 계십니다” “그런 물건 안 계십니다”는 쓰지 않을 사물에 경어를 잘못 쓴 경우이고, “총살해야 한다” “애비와 똑같다”는 한 마디로 무식한 폭언이다.

 적지 않은 초·중·고교 학생들이 입에 달고 사는 욕지거리는 조사 결과 그 뜻조차 모르고 쓴다고 한다. 총살·애비 등등의 말을 쓴 사람은 그 뜻이 무엇인지 모르고 썼을 리가 없다. 극소수의 위장 탈북자 외에는 우리 모두가 그들을 보살펴줘야 한다. 왜, 어떻게 그 어려움을 뚫고 탈출을 했는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또 박 대통령은 밉든 곱든 간에 국민이 선택한 지도자다. 국가원수에 대한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것은 지각 있는 사람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며칠 전 세상을 떠난 고 채명신 장군은 “나는 병사들을 사랑한다. 그들 묘역에 함께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고 그래서 병사 묘역에 안장됐다. 얼마나 감동을 주는 말이고 행동인가. 1925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아일랜드의 극작가 버나드 쇼는 남을 비난·비판한 적이 없고 칭찬만 했다고 한다. 쇼는 세계 제1의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힌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신의 노여움을 사고 있어. 사람이 할 수 있는 것과 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서로 다른데 당신의 바이올린 소리를 신이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그의 묘에는 스스로 써넣은 비문을 새긴 묘비가 있다고 한다. “나는 우물쭈물 오래 살다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채 장군이 장군 묘역에 묻힌다고 해서 누가 시비할 사람은 없다. 쇼가 우물쭈물 살았다고 생각할 사람도 없다. 채 장군도, 쇼도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그 감동은 자신을 낮춘 겸손의 언어가 주는 것이 아닐까.

 우리 사회에서 말의 격(格)이 땅바닥에 떨어진 것은 스스로 잘났고 자신의 정치 소신이 제일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앞에 나서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오만과 착각 때문에 자기의 격을 스스로 깎고 사회의 풍격(風格: 물질적·정신적 창조물에서 보이는 고상하고 아름다운 면모나 모습)을 낮추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국회의원 중에도, 판·검사 중에도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이 일을 어찌하나, 누가 말 좀 가르쳐줘야 할 텐데…. 어느 자리에서 이 ‘말 교육’이 화제가 됐다. 두 가지 의견이 나왔다. 그중 하나는 언론이 그것을 담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막말·폭언·억지주장 등을 다루고 비판하는 특별 코너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의견은 지도층의 말을 평가해 발표하는 기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사회운동을 하는 비정부기구(NGO) 가운데 그런 조직은 왜 없느냐는 이야기도 나왔다. 글쎄, 찾아보면 제3, 제4의 방안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말 좀 가르쳤으면 좋겠다.

김동익 언론인·전 정무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