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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타수에 맡겨진 『총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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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오늘부터 4인 체제나 반 4인 체제는 없다.』 정일권 신임 공화당 의장 서리가 27일 취임 첫 당무회의에서 한 말이다. 정 당의장의 말은 당내에 파벌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며 실상 공화당에 파벌이 없었다고 단정할 사람은 공화당 안에도 드물다. 정당에는 이견이 있고 파벌이 부침하기 마련이다. 이러나 공화당의 경우 이른바 「일사불란」이라는 지도지침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파벌이 용인되어 있지 않다. 파벌이 용인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당내의 판도는 산맥처럼 눈에 드러나 보이지 않지만 이해에 따라 그 산맥은 해저에 깔린다.
정 당의장의 파벌해소 선언은 바로 이 음성적인 당내 파벌이 위험수준까지 고착화되어가고 있기 때문에 그 경고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공화당의 파벌은 구획선이 뚜렷하지 않지만 「4인 체제」니 「반 4인 체제」니 하는 말은 당원들간에도 흔히 쓰인다.
「4인 체제」는 당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당권파.
지난해 두 차례 선거를 치러낸 이 「4인 체제」는 백남억 전 당의장·김진만 재경위원장을 포함하여 「10·2 파동」으로 당을 떠난 길재호 전 정책위의장·김성곤 전 재정위원장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대야 관계와 국회의원 공천 등에 영향력을 행사해온 이 당권파는 길·김씨가 물러선 뒤에도 구태회 정책위 의장·길전식 사무총장·현오봉 원내 총무·김진만 재정위원장을 한 「라인」으로 당내문제나 대 국회문제 등에 있어 빈틈없는 주도권을 행사해왔다.
한 「팀」의 호흡이 잘 맞다보면 주변에 반발심을 유발하게 되고 그럴수록 기성 「팀」은 결속을 강화한다. 어느 것이 원인이고 어느 것이 결과인지 가름하기 어렵게 된 단계에서 당권파와 반 4인체제의 틈은 넓어져 갔다.
물론 반 4인 체제라는 것도 조직화 된 것은 아니다. 친소에 따른 인맥을 통틀어 하는 얘기다.
그 가운데서 장경순 오치성 김재순 김형욱 「팀」이 가장 강경하며, 연결선은 다르지만 육인수 차지철 유승원 민기식 장덕진 한병기 홍병철 신동관 최재구 강병규 문형태 임충식 김숙현 박명근 정우식 정무식 의원 등으로 꼽히는 친위 「그룹」이, 그리고 김용태 서상린 장영순 김종익 의원 등의 구 주류를 들 수 있다.
○…파벌간의 반목이 행동으로 폭발한 것이 바로 지난해의 「10·2」파동이다. 오치성 내무장관을 상대로 낸 신민당의 불심임안에 일부 「4인 체제」의원 등이 가세, 가결토록 한데서 길·김 두 의원이 탈당하게 되고 김창근 강성원 문창탁 의원이 정권처분을 받았었다.「반 4인 체제」에서도 당내 불화를 조성했다는 이유로 오 의원이 정권을 당했으며 김재순 원내총무는 총무직을 물러났다.
「10·2 파동」을 분수령으로 당내 반목은 일단 기세가 꺾였다. 그러나 「4인 체제」의 당권 주도는 그 밖의 세력과 거리가 생긴 게 사실이다. 『자기들끼리만 똘똘 뭉쳐 다닌다.』 『「골프」도 다른 의원들과는 치지 않는다.』 『같은 의원끼리인데도 실력자를 만나기조차 힘들다』는 불만이 그 거리를 말해주었다. 당권파 쪽에서도 『일을 하려면 간부들끼리 자주 만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고 했다.
백두진 국회의장이 국회 운영문제에 있어 현오봉 총무에게 공격의 화살을 겨냥했던 것이나 급기야는 자신의 사임서를 내기까지는 신민당뿐 아니라 공화당 실권파에 대한 불만도 깔려 있었다는 게 「업저버」들의 견해다. 이런 불협화음이 계속되는 가운데 박정희 총재는 백 당의장에게 두 차례나 사신을 띄워 소속의원들 간의 친화를 종용했다.
7월초에 보낸 사신에서 박 총재는 당내 소속 의원들 간의 불화를 지적, 의장이 앞장서서 불협화를 제거하는데 노력할 것을 당부했다는 것.
당내 친화운동과 관련해서 당 간부들과 상임위원장들이 청와대로 박 총재를 개별적으로 방문하는 일도 빈번히 이루어졌다.
백 당의장이 정일권 총재 상임고문을 자택으로 방문하고, 「골프」를 치거나 평소에 관계가 소원했던 오치성 김재순 의원 등을 초대해서 점심이나 저녁을 함께 하기도 했으며 김종필 부총재와 백두진 국회의장, 백 당의장 등의 인천 회식도 이루어졌다.
○…「10·2 파동」을 계기로 의원들 간에는 탈 계보운동이 벌어졌던 것도 사실이다. 파벌의 상층부는 계파농도가 짙지만 아래로 내려올수록 흐리다. 소속 의원들 안에는 소외감을 갖고있는 사람들도 많다. 당내에서 무슨 체제, 무슨 파 얘기로 술렁술렁하면 많은 의원들은『나는 아무 데도 속하지 않는다』는 말을 앞세우기 일수다.
말로써 파벌색을 숨기려는 것이 아니라 계파류별에서 받는 손실이 더 크다고 믿는 것 같다. 실제로 정점(당총재) 이외의 중간 구심점은 오랫동안 부침이 있었을망정 그 정치적 장래는 보장이 없었다. 공화당 의원들은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파벌지양이라는 정 신임 당의장의 숙제는 그런 의미에서 무한의 난제는 아니다.
정 의장은 당내 화합뿐 아니라 국회·행정부·당이 삼위일체 된 총화체제를 구축하겠다고 했다.
당내에는 불협화를 없애기 위해 정부·여당간부들의 정기적인 정례모임, 당 간부와 소속의원들 간의 수시 대화, 당 의장실의 문호개방 등을 제의하는 사람도 있다.
어쨌든 정 의장이 내건 당내 화합, 그리고 의정, 행정, 당정의 조화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이며 그것이 여당 진영 밖에까지 파급할 초당적, 국민적 총화에 어떻게 동작할지 주목된다. <심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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