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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에 살고 지고…] (4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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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지이산(智異山)이라고 쓰고

지리산으로 읽는다

-이병주

백두대간은 그 등뼈를 세워 뻗어내려 오다가 한반도의 아래 쯤에서 호남과 영남의 지평을 거머쥐고 우뚝 일어서니 그 산이 지리산이다. 묘향이나 금강과 키재기를 하던 우리의 명산 지리는 동족상쟁의 6.25를 만나 민족사에 또 다른 산으로 이름을 갖는다.

땅끝까지 쳐내려 왔다가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막힌 인민군이 지리산으로 들어가 전선을 펴고 저항을 하고 있었다. 휴전협정으로 남북전쟁은 멈췄지만 지리산을 에워싼 이른바 공비토벌작전은 쉽게 끝나지 않고 있었다. 지리산의 패잔병들을 정부는 공비라고 했고 사람들은 '빨치산'으로 불렀다.

이 민족사의 깊은 상처를 대하소설로 쓰자고 붓을 든 이가 이병주였다. 이병주는 1921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43년 일본 메이지대학 문예과를 졸업하고 다시 와세다대학 불문과에 진학한 첨단 엘리트였다.

44년 학병으로 끌려간 그는 중국 일본군 수송대에 예속되었다가 해방을 맞아 46년 3월 미군 LST를 타고 귀국한다. 48년 진주농고 영어교사로 강단에 설 때 이형기 시인은 학생이었다.

이병주는 56년부터 국제신보 주필겸 편집국장을 하면서 4.19직후에는 '새벽'에 '조국은 없다. 산하가 있을 뿐이다'등 한반도의 중립화를 부르짖는 글을 쓴다. 그런 앞서가는 논조를 편 것과 경남교원노조 고문을 맡았던 것이 빌미가 되어 5.16후 10년형을 받는다.

2년 7개월의 복역 끝에 감형되어 출옥한 이병주는 감옥에서 생각을 짜두었던 '알렉산드리아'를 1주일 만에 탈고, 신동문 시인에게 준다. 신동문은 이 소설을 '세대'의 주간 이광훈에게 추천했고 이광훈은 40대 중반의 무명작가의 소설에 눈을 크게 뜨며 전재한다.

소설가로는 늦깎이로 등단한 이병주에게 문단은 파격적 찬사를 주었다. 한번 터진 그의 이야깃거리는 홍수처럼 마구 휘달리기 시작했다. '마술사''쥘부채'등 중편과 잇따라 장편을 써내던 이병주는 대하소설 '지리산'을 '세대'에 72년 9월부터 78년 8월까지 6년간에 걸쳐 연재한다.

주인공 박태영이 공산당원으로 빨치산이 되어 지리산에 들어가 이현상이 이끄는 남부군의 대원이 되는 과정, 지리산 빨치산의 활동과 그 종말을 자기 체험인듯 이병주는 써내려간다. 뒤에 밝혀진 대로 소설에도 나오는 이태라는 실재 인물의 기록과 증언에다 그의 작가적 상상력이 역사의 큰 골짜기를 생생하게 그려낸 것이다.

나는 '한국문학'을 맡으면서 중편을 앞에 싣기 시작했다. 약속한 날짜에 중편이 들어오지 않으면 애를 태웠다. 그럴때 이병주는 어김 없었다. 단편이면 사흘, 중편이면 일주일이면 족했다. 그렇게 실은 중편 '국화와 삐에로'를 읽고 오탁번 시인은 "요즘 잘 쓴다는 젊은 작가가 몇 달 두고 쓴 소설 보다도 좋다"고 했다.

그의 고희 잔치가 부산에서 열렸을 때 서울에서는 이형기와 내가 참석했었다. "나는 이근배씨 계(系) 입니다"고 서슴없이 말하던 이병주. 한달 평균 원고지 1천장을 써내던 지리산만큼이나 깊은 이야기 골짜기를 숨기고 92년 4월 그는 이 산하를 떠났다.

이근배 <시인.한국시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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