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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 스타] 영화배우 첫걸음 가수 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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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면

누가 눈밭을 하얀 융단이라고 했나. 가수 비(21.본명 정지훈)는 포근한 눈이 이렇게 날카로운 줄 몰랐다. 종아리.허벅지를 송곳처럼 찔러대는 눈얼음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또 휘몰아치는 차가운 바람이란?

"으으~, 아아~" 고통스런 신음이 절로 터진다. "정말 도전 정신 하나로 영화에 달려들었는데…."

양윤호 감독도 야속하다. 온몸이 꽁꽁 얼었는데도 요구가 끊이지 않는다. "지훈아. 움직여야 해. 배에 힘을 더 주고. 가만히 있으면 큰일난다"며 계속 재촉한다. 3월의 대관령에 큰 눈이 내려 즐거운 모양이다. 기다리던 눈 장면을 찍을 수 있으니 그럴 만하다. "지훈아. 해 떨어진다. 조금만 더 가자"고 다그친다.

비는 오기가 난다. 그래 "한번 죽어보자"라며 이를 악물었다. "감독님, 한번 더 가죠"라고 자청했다. "이왕이면 해가 멈췄으면 좋겠네요"라고 반격했다. 감독은 기다렸다는 듯 "어허, 이제 연기하는 맛을 알았나 보지. 욕심은 많아서"라며 서정민 촬영감독에게 재촬영 사인을 보낸다. "역시 한 수 위군." 비는 포기했다. 그래 "나를 잊자."

지난주 대관령 자락의 한 목장. 눈 쌓인 비포장도로를 자동차로 40여분 힘겹게 올라가니 별천지가 펼쳐진다. 은빛 고원 지대가 한눈에 내려보이는 언덕에 오르니 비가 덜덜 떨며 서 있다. 스태프들이 몰려 들어 두터운 외투로 몸을 감싸주고, 쑥찜팩으로 손발을 덥혀주지만 그의 얼굴은 온통 시퍼렇다. 찢어진 도복 사이 종아리엔 피멍도 보였다.

처음엔 비를 몰라봤다. 브라운관에서 내 세상을 만난 것처럼 현란한 춤을 추던 앳된 얼굴의 그는 어디에도 없었다. 치렁치렁한 머리칼이 그의 얼굴을 반쯤 가렸고, 추위와 카메라에 지친 그는 연신 신음을 토해냈다. "정말 춥죠"라고 물으니 "아무 생각 안나요"라고 짧게 답한다. 어른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밭을 수 차례 달려내려온 그다.

지난해 인기 가수로 급부상한 그는 이날 드디어 배우로 첫 걸음을 내디뎠다. 황소를 한 손으로 제압했다는 전설적 무술인 최배달(본명 최영의.1922~94)의 젊은 시절을 그린 '바람의 파이터'(감독 양윤호)가 촬영에 들어간 것이다.

올 1월 방송 활동을 접고, 지난 3개월간 매일 여섯시간 이상 몸을 다져왔으나 대관령 눈밭은 상상을 초월한 강적이었다. 이날 제작진은 일본인에게 멸시받았던 조선 청년 최배달이 누구도 무시 못할 자신을 만들기 위해 입산 수행을 하는 장면을 찍었다.

몸이 다소 녹았는지 비가 농담을 걸었다. "최배달 선생님은 왜 이런 겨울에 훈련을 했을까요. 그 좋은 여름철을 두고 말입니다." 살짝 웃으니 그의 곱상한 얼굴이 되살아난다. 그는 지난해 말부터 일본에서 최배달이 창시한 극진가라테 동작을, 한국의 액션스쿨에선 액션의 기본기를 배웠다.

다시 감독의 촬영 사인. 비는 종전과 반대로 순백의 언덕을 거듭 뛰어 올랐다. 엎어지고 넘어지기를 반복했다. 끝내는 큰 대(大)자로 눈밭에 드러누웠다.

그리고는 스턴트맨을 상대로 대련에 들어갔다. 가상의 자신을 상대로 겨루는 장면이다. 가늘게 뜬 눈으로 상대롤 노려보는 눈매가 날카롭다. 허공을 가르며 적수를 제압하는 손발의 놀림도 신속.경쾌하다.

"아직 힘이 달리는 편입니다. 지난 8년간 춤추며 몸을 만들었으나 영화엔 별 도움이 되지 않아요. 극진 가라테는 실전 무술이거든요. 같은 액션이라도 무게감이 있어야 합니다. 가볍고 과장된 동작이 많은 일반 액션물과 전혀 달라요. 다음달 중순 일본에서 본격 촬영에 들어가는데 그 때까지 근력을 더 키워야죠."

감독이 미소를 지었다. "얘, 정말 독종입니다. 오늘도 몇 차례나 자기가 더 찍자고 하잖아요. 지난 지옥훈련 때도 그랬어요. 훈련이 없는 날에도 혼자 일찍 일어나 달리기를 하더군요."

최배달에겐 나라 잃은 백성의 한이 있었다. 그 한이 그를 주먹 하나로 세계를 평정하게 했다. 그렇다면 비에겐? 그는 무엇 때문에 잘 나가던 노래를 잠시 접었을까.

"어려서부터 최배달 선생님을 존경했어요. 만화를 읽었죠. 그 분의 대단한 무술과 고독한 내면에 반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오기가 생겼어요. 제가 깜짝쇼에 출연한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에게 뭔가 확실히 보여줄 겁니다."

가족사를 건드렸다. 가난한 떡집 아들, 한땐 소년 가장, 가수 박진영의 백댄서, 그리고 3년 전 당뇨병 합병증으로 돌아가신 어머니까지…. 그는 "오기와 집념은 단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서 시작됐다"고 말했다. 어머니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겠다고 했다. 눈가가 축축해졌다.

"이제 비는 가수 아닌 배우?"

"아니요. 춤추고 노래만 했는데요. 가수가 길이라면 배우는 도전이죠."

"앞으로 더 힘들텐데?"

"무릎이 깨지고, 목이 빠져도 할 거예요. 이제 시작인데요, 뭐."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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