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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번 후보 프로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그는 승리를 위해 인내·기술·평범한 노력을 기울여 많은 난관을 극복했다』-.
「머스키」가 후보사퇴를 선언하면서「맥거번」에게 바친 이 송사는 그대로「조지·스탠리·맥거번」의 정치역정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미국 중 북부 한촌출신으로 4년의 하원, 2년의「케네디」보좌, 10년의 상원의원을 거쳤으되 1백 명의 상원의원 중 서열 54위에 머물렀던「맥거번」이 오늘 백악관을 겨냥하는 자리에 오르게 된 그 긴 여로가 이 한마디에 집약돼있기 때문이다.
22년 7월19일「사우드다코타」주「에이번」시의 한 감리교 목사집안에 태어난「맥거번」은 평소는 무척 부끄럼을 탔지만 웅변에는 능해 고교시절엔 웅변반장도 지냈고 연례 주 웅변대회에서 두 번 이나 우승을 차지한바 있다.
「다코타웨슬리언」대학입학, 재학 중 B-24 폭격기 조종사로 2차 대전에 참전한 후 훈장 단 중위로 제대, 군복무 중 결혼한 부인과 두 자녀의 생계를 위해 빈 병을 모아 돈벌이를 하면서「웨슬리언」대서 학사,「일리노이」주「노드웨스턴」대학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획득한 그는「노드웨스턴」서 교목, 「웨슬리언」대서 역사와 정치경제를 강의한 후 본격적인 정계투신은 53년부터였다.
그러나 그는 이에 앞서 48년, 당시 민주당「투르먼」대통령의 대소냉전정책에 반대, 젊은 식자층의 인기를 모으던「헨리·월리스」상무장관의 진보당 후보지명운동에 가담한 적이 있었다.
미국공산주의자들이「월리스」진영에 침입했다는 비난이 나돌자「맥거번」은 이 운동으로부터 즉각 손을 뗐지만 그의 진보적 자유주의 정치철학은 이때부터 성숙, 벌써 이 시기에 중공의「유엔」가입을 주장했다.
그의 본격적인 정치생활이 시작된 것도 그의 대 중공견해와 51년 한국동란의 휴전요구에 따른 교수직파면으로부터 비롯됐다.
56년 그는「사우드다코타」하원의원 선거에 민주당후보로 출마, 재선을 노리는 공화당후보에게 압승했다. 공화당의 아성인「사우드다코타」에서 민주당의원이 선출되기는 20년만에 처음이었다.
8개월 동안의 선거기간 중 쓴 돈이 전부 1만2천여「달러」에 불과했지만 그것도『「맥거번」을 의회로』라 새긴 단추를 만들어 판돈으로 충당했다.
60년 그는 상원의원에 출마하는 한편,「존·F·케네디」의 대통령선거운동을 지원했다.「맥거번」은 낙선됐으나 이때부터「케네디」와의 인연을 맺었다.
62년 공화당「프란시스·케이스」상원의원이 사망하자 보궐선거에 출마, 「케네디」의 지원으로 당선됐다. 고「로버트·케네디」부인「에델」여사가 그를 가리켜『우리의 위대한 친구』라고 불렀던 것은 유명하다.
68년「시카고」전당대회에서 그는 암살 당한「로버트·케네디」진영을 위해「대리」후보로 나섰다. 물론 뒤늦게 출발한 후보출마였던 까닭에 실패는 했어도 이때부터 그는 백악관에의 꿈을 품기 시작했다.
69년의 반전시위연설, 70년의 월남전『종전결의안』주동은 모두 71년 1월18일의 민주당대통령후보 출마선언과 직결되는 정치활동으로 판단된다.
후보출마를 선언하고 나선 1년 6개월 전 정치가에게 필수적인「카리스마」와 힘이 모자라『팔리지 않을 상품』이란 평을 받던「맥거번」이 오늘에 이른 데는 거대한 개혁의 물결을 탄 것 이외에 역경을 극복하고 일어서는 불굴의 투지가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한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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