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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정애의 시시각각

백마 탄 초인을 기다려야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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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고정애
정치국제부문 차장

근래 가장 인상적이었던 말은 이거다.

 “No, no, no, he can stay there.”

 ‘아니 아니 아니, 여기에 있을 수 있다’쯤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게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5일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이민개혁법안의 의회 통과를 촉구하던 중 소동이 벌어지자 한 말이었다.

 연설 말미에 청중의 한 명-결국 한국계 홍모씨로 확인됐다-이 “오바마씨”라고 외쳤다. 그러곤 불법 이민자 추방을 중지해야 한다는 요지의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연설을 계속하려던 오바마가 홍씨를 돌아보며 “우리가 우려하는 바이기도 하다. 내 말을 끝내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홍씨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소란은 이어졌고 급기야 한 명의 고함이던 게 여러 명의 함성으로 바뀌었다. “추방 중단, 추방 중단.”

 정작 말이 끊긴 건 오바마였다. 무려 아홉 차례였다. TV중계 화면엔 급기야 비밀경호원들이 홍씨에게로 향하는 듯 청중들이 밀리는 듯한 모습도 보였다. 요원들은 그러나 끝내 화면에 등장하지 않았다. 오바마가 말려서다. “괜찮다” “나가게 할 필요 없다”고 했고 세 번째이자 마지막엔 “No, no…”란 말을 했다.

 그 순간이었다.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온 게. 앞서 함성에 동조했던 이건 동요했던 이건 다르지 않았다. 홍씨도였다. 50초 만의 반전이었다. 오바마는 곧 “젊은이들의 열정을 존중한다”면서도 “더디고 힘들지라도 의회에서 법 통과란 민주적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취지로 설득했다. 또 박수가 터졌음은 물론이다.

 “부럽다.” 이 비디오클립을 보라고 권한 이가 한 말이었다. 그저 그 말뿐이었지만 능히 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사실 냉정하게 보면 오바마가 달리 행동할 순 없었을 게다. 연설 도중 방해한 이들을 현장에서 설복해내지 못하고 쫓아낸다? 민주주의 진영의 대표적인 지도자로선 오점이 될 터였다. 그 자리에서 승부를 봐야 했다. 설령 쫓아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도 그리 해선 안 됐다. 대의제여서다. “영국인은 5년마다 자신들이 대표를 직접 선출하므로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5년 중 단 하루만 자유로울 뿐”이라고 냉소한 18세기 프랑스 지식인의 후예도 결국 ‘단 하루만 자유로운 길’을 택했다. 자신들이 선택한 지도자가 그나마 자신들을 위한 종복(從僕)-종북이 아니다-이 될 것이란 믿음에서다. 그간 민주주의 진영이 확장되어 왔다는 건 지도자들이 대체로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게 처신해서일 게다. 그제의 오바마처럼 말이다. 그 덕분에 미국 정치가 엉망이라고 낙담했던 인사들도 잠시나마 안도했을 테고.

 요즘 우리는 어떤가. 명목상 같은 대의제를 하는 데 체면치레라도 아니 시늉으로라도 “여기에 있을 수 있다”고 말하는 건 고사하고, 내 편이 아니라고 내쫓는 지경까지 나빠진 게 아닌가 걱정스럽다. 최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언행이 그랬고, 그걸 본 대통령이 “용납하거나 묵과하지 않겠다”고 하자 검찰이 시민단체의 고발을 이유로 수사에 나서는 모양새가 그랬다. 이리저리 꼬여 어디로 튈지 모르게 된 국정원 사건처럼 말이다. 적 아니면 동지란 이분법적 사고와 배제의 논리만 판칠 뿐이다. 그저 ‘진격’뿐이다.

 그새 대통령과 청와대를 바라보던 기대에 찬 시선은 싸늘해지고, ‘내일은 없다’는 민주당의 무능과 생떼를 보며 진정 민주당엔 내일이 없다고 절감한다. 대안세력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있으나 그들에겐 정작 대안은 없다. 어디 하나 눈 둘 데가, 정 붙일 데가 없는 거다.

 그러던 차 한 지인이 말했다. “지난해엔 누가 당선돼도 새 시대가 열릴 거라고 봤다. 이제 보니 여권도, 야당도, 시민단체도 모두 앙시앙레짐(구체제)이다. 시인 이육사의 심정이다.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超人)을 기다리는….” 그에게 말해야 했다. 그런 초인이 설령 온다 해도 천고(千古) 뒤일 거라고.

고정애 정치국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