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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4)(제자 윤석오)<제26화>내가 아는 이 박사 경무대 사계 여록(12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광복 외교 시절>
내가 이 박사를 모시고 국사를 도운 것은 49년 6월 2대 공보처장 때부터지만 그보다 훨씬 전부터 이 박사와 같이 일했다.
1938년 나는 미국 「컬럼비아」대학에 유학하고 있었다. 그때 「하와이」에 있던 이 박사가 「제네바」군축회의에 참석키 위해 「뉴요크」를 들렸다.
상해임시정부 때부터 서로 알고 있던 처지라 이 박사는 뉴요크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비서로 일해 달라고 했다. 마침 나는 재미 유학생회의 총무 및 사회부장을 맡고 있던 터라 이 박사를 모시고 여러 가지 일을 도왔다.
그 당시 일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이 박사가 「뉴요크·타운·홀」에서 미국·일본 사람들과 함께 시국 강연을 한 내용이다.
이 박사의 연설은 큰 주목을 받았고 나중 그대로 들어맞았다. 정확히는 기억할 수 없으나 내용은 대충 이런 것이었다.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이 만주를 삼킨 후에는 중국을 침략할 것이다. 중국 침략이 성공하면 또 「필리핀」을 먹으려 들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본은 미국과 전쟁을 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런 일본의 침략 기도를 초반에 꺾어야지 그대로 내버려뒀다가는 나중에는 미국이 난처한 입장에 빠질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한번은 내가 이 박사를 해수욕장으로 모시고 가던 중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했다. 화가 나면 손을 입에 대고 후후 부는 이 박사의 습관이 갑자기 튀어나왔다. 이 박사는 「하와이」 교포가 주선해 준 「지프」를 직접 운전했고 나는 옆자리에 타고 있었다.
교통이 복잡한 「타임스·스퀘어」를 지나가는데 이 박사가 갑자기 운전을 하다 말고 손을 후후 불었다. 그러자 「지프」가 「지그재그」하여 사고가 날 뻔했다.
경찰이 쫓아와서 「갓뎀·차이니즈」라면서 욕을 했다. 아마 우리를 중국인으로 안 모양이었다.
이 박사가 화가 나면 손을 후후 부는 습관은 일제 때 감옥에 있을 때 당한 고문 때문이다.
감옥에 있을 때 일본 사람들이 이 박사의 손톱 밑을 대쪽으로 찌르며 고문을 했다. 이 박사는 아파서 입으로 손톱을 불었고 이것이 습관이 되어 무의식중에 화가 나면 튀어나오곤 했다는 것이다.
이 박사의 재미 생활은 퍽 어려웠다. 하와이 고모가 보내 주는 돈으로 겨우 생활을 이어 나갔으나 말이 아니었다.
저녁때가 되면 이 박사는 내가 있는 아파트에 들렀다. 이 박사와 나는 「컬럼비아」대학 옆 지하실에 있는 중국 음식점에서 「완당」이란 국수 한 그릇으로 끼니를 때우곤 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이 박사는 그때 「제네바」에 건너가서 일본을 퍽 난처하게 만들어 일본 대표가 회의장에서 제발로 퇴장하게 하는 등 활약이 컸다.
일본은 그때 만주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주에 있는 중국인과 한국인들이 일본 통치를 찬성한다고 선전하고 있었다. 이 박사는 친하게 지냈던 중국 대표 안혜경씨와 협력하여 일본 주장을 공박했다.
이 박사는 상해임시정부가 보낸 만주에 살고 있는 한국인 3만명이 일본 통치를 반대한다는 연판장을 「제네바」 회의에 제출했다.
일본 대표 「마쓰오까」 대사는 자기네들 선전이 거짓임이 폭로되자 『국제연맹을 탈퇴한다』고 퇴장했다.
독립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이 박사와 상해임시정부 측은 이견이 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이 박사는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외교 활동을 통해 독립 쟁취에 힘을 기울었다.
미국에서도 같이 독립 운동을 하던 이 박사와 도산 안창호 선생은 퍽 대조적이라는 평이 있었다.
도산은 시골에서 공부하는 유학생이라도 자신이 직접 찾아가 흥사단에 가입시켜 독립운동을 돕도록 했다. 반면에 이 박사는 성격이 고고한 편이어서 상대방에서 찾아가 머리를 숙여야 했고 비위에 맞지 않으면 싫어하는 일면이 있었다.
이런 점이 이 박사와 상해임시정부간의 불화의 원인이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40년에 일단 귀국했으나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1년간 감옥 생활을 하다 북경으로 피난을 갔다. 해방을 거기서 맞고 45년 12월에 귀국해 보니 이 박사는 이미 2개월 전에 환국해 있었다.
돈암장에서 기거하던 이 박사를 찾아갔더니 손을 붙들고 미국에서 고생하던 얘기를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 박사가 정부 수립 문제로 미 점령 군사령관 「하지」와 의견이 대립됐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신이다.
나는 46년 1월부터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미군정 공보부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이 박사와 「하지」장군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중재하느라고 바빴다.
이 박사와 「하지」와의 이견과 관련하여 한가지 분명히 밝혀 둘 것이 있다. 최근 미국무성이 공개한 외교 문서 중 『이 박사가 미군 철수를 주장했다』는 부분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
이것은 이 박사와 사이가 나빴던 「하지」장군이 엉터리로 자기에게 유리하게 보고했기 때문이다.
이 박사는 미군이 계속 주둔하여 신생 한국의 국방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고 다만 정치는 한국 사람에게 맡기고 손을 떼라고 했었다. <계속> 【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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