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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2) <제자 윤석오>|<제27화>내가 아는 이 박사-경무대 사계 여록 (119)|임영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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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재미 시절>
내가 이 박사를 처음 만난 것은 1923년 관동 대 진재 때 일본이 우리 한국인에게 저지른 만행을 담은 「필름」을 이 박사에게 전달하려고 처음 미국에 갔을 때이다.
이 박사와의 상면은 전혀 우연이랄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독립 운동의 한 과정에서 저절로 연결된 것이다.
3·1 독립 선언이 서울에서 있은 며칠 후 전주 장날에 1만명이 넘는 시민·학생이 모여 만세를 부른 사건을 주동했다 해서 나는 6개월간 옥고를 치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출옥 후 일본에 건너갔으나 그곳에서도 오래 있지 못하고 다시 고국에 돌아와 공주 영명 학교와 이화 학당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중 자유주의자인 한 일본인 교수의 도움으로 나는 미국 행 여행권을 얻게 되었다.
그때 (1923년9월) 마침 관동 대 진재가 일어나 엄청난 피해를 본 일본은 이 지진을 이용하여 한국인이 폭동을 일으킨다고 뒤집어 씌워 6천명이나 학살했다.
이 참혹한 광경을 지켜본 한국 유학생인 김낙영은 사진을 찍고 죽은 사람의 명단까지 만들어 국내에 있는 독립 운동 단체에 보냈다.
미국 행 준비가 거의 끝난 어느날 「와세따」 (조도전) 대학생이던 유태영씨 (전 주일대사 유태하씨 형)가 찾아와 그 광경을 담은 「필름」과 미국에 있는 이 박사에게 보내는 비밀 문서를 건네주면서 이 박사에게 전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잠시 주저했으나 그때까지 얘기만 듣고 있던 이 박사를 만나게 된다는 생각에 승낙했다. 「필름」과 비밀 문서를 감출 곳이 없어 걱정하고 있던 차에 마침 황신덕 (현 중앙여중·고 이사장)이 일본에 있는 친척에게 전해 달라면서 과일을 한바구니 가져왔다.
바구니 밑에 숨겨 신문지로 덮은 다음 그 위에 과일을 얹어 바람이 찬 12월 어느날 부산에서 연락선을 탔다. 일본 경찰은 내 물건을 샅샅이 뒤지고 사과 1개를 꺼내 먹기도 했으나 발견치 못했다. 그때의 아찔하고 조마조마하던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땀이 날 지경이다.
19일간의 항해 끝에 「샌프런시스코」에 닿아 「팰리스·호텔」에 머무르고 있던 이 박사를 찾아갔다. 그때까지 말로만 듣던 노 애국자를 직접 대하니 무사히 임무를 완수했다는 생각에 눈물이 앞섰다.
가지고 온 문제의 물건을 전달하자 이 박사는 나의 등을 두드리며 『너 같은 용감한 딸이 있으니 조선은 꼭 독립될 거야. 이 사진을 출판해서 전세계에 알리겠다. 앞으로 자주 찾아와 나를 도와줘』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박사의 첫 인상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영원한 기쁨이다.
6년 후 난 「켈리포니아」 대학에서 BA 학위를 받은 나는 그때 「워싱턴」에 있던 이 박사를 찾아갔다. 어느날 이민으로 와 있던 이순길 목사 집에 저녁 초대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씨는 이 박사의 뜻이라고 하면서 그와 결혼을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기쁘기도 하고 당황한 심정이었다. 나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해서 오빠에게 전화로 상의했더니 반대였다.
며칠 후 이 박사를 직접 만나 「고국에 돌아가 국민을 교육시키며 박사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그의 간접 청혼을 거절했다. 이 박사는 한참 동안이나 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좋은 생각이야』 하면서 등을 두드렸다.
만약에 그때 내가 이 박사의 청혼을 받아들었다면 한국의 역사는 또 다르게 변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승당」이라는 나의 호는 이 박사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9년만에 고국에 돌아온 나는 그 당시 경영난에 허덕이던 중앙 보육원을 인수하여 육영 사업에 힘을 쏟았다.
8·15 해방이 되자 나는 이 박사의 귀국을 기다리며 민원숙, 황현숙, 한도숙, 이은경, 양배상, 이은혜 (윤치영씨 부인) 등과 합쳐 한국 여자 국민당을 조직했다.
8월16일로 기억되는데 여운형씨가 일본의 청을 받아들여 정당을 만든다기에 계동에 있던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가 없어서 돌아 왔다. 이튿날 그의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 이 박사와 김구씨가 돌아올 때까지 정당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으나 그는 끝내 듣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냥 가만히 있을 수도 없어 나는 그 길로 인촌 김성수씨와 고하 송진우씨 집을 찾아가 여씨의 행동을 만류해 달라고 간청했으나 그들도 그가 말을 듣지 않아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었다.
국내 정세가 극도로 혼란해지고 수백개의 정당이 우후죽순 격으로 새로 생겨나 난립한 가운데 이 박사는 그해 10월16일에 고국에 돌아왔다.
귀국 후 이 박사는 처음에는 조선 「호텔」에 머물렀으나 그후에는 돈암장·마포장으로 옮겨다니다 다시 이화장으로 옮겼다.
송진우·김성수·윤치영·허정·장덕수씨 등은 이 박사가 돈암장에 있을 때 이 박사 귀국환영회를 열고 이 박사의 시중을 「프란체스카」 여사가 한국에 올 때까지 내가 맡도록 결정했다.
나는 타자를 치기도 하고 국문 편지를 영어로 옮겨 쓰고 국내외 원고 기사 정리 등 이 박사의 비서 일로 눈코 뜰 사이 없이 바빴다. 돈암장은 덩그렇게 크고 적적해서 윤치영씨 내외와 함께 지냈다.
그 사이 「워싱턴」의 「프란체스카」는 이틀이 멀다하고 편지를 보내 왔으며 이 박사도 직접 편지를 쓰거나 나를 시켜 대신 「타이프」를 쳐서 보내기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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