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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숙종 때 암행어사 박만정의 행적<제자는 『해서암행일기』의 표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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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5월5일 흐리다.
일찌기 출발, 김천 객사에 이르러 조반을 먹었다. 백천군의 문서를 다시 보충 조사키 위해 김천으로 갖고 나오도록 통첩해 두었으므로 그 하인이 오기를 기다려 이곳에서 유숙하였다.

<가짜 어사가 행패>
김천군수 이수장이 와서 뵙더니 가 어사 얘기를 꺼냈다. 말인즉 한양에 사는 박희경이란 자가 예조의 서리를 지내다가 죄짓고 파직되었는데 지금은 어사근의 배리다 사칭하고 파주·장천을 거쳐 말을 달려와 평산·백천 등 읍을 횡행하며 가는 곳마다 행패를 부렸다고 했다.
그는 어사의 권세를 빙자해 식량과 주육을 마구 거둬들이다가 그만 송도에서 본색이 탄로돼 내빼는 것을 이 고을에서 체포해 감영으로 송치했다는 것이었다. 가노 계상이가 서울에서 편지를 갖고 도착했다며 나온지 처음으로 듣는 집안소식이다. 모두 편안하다니 반갑고 마음이 놓였다.

<5월6일 비가 오다.>아침 일찌기 출발하여 송도에 와서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 장단객사에 들렀다. 장단부사인 사돈 남공은 그동안에 임기가 완료되어 서울로 떠나고 없었다. 그의 척족 이경과 조카가 와서 뵈었다. 저물어서 파주에 도착, 특사 이식과 함께 잤다.

<객사서 서계 준비>

<5월7일 비가 오다.>고량부 객사에 이르러 잠시 쉬고 한강 촌사(행주부근인 것 같다)에서 묵으면서 서계를 준비했다. 아우가 비로소 찾아봤다.

<5월8일 비가 오다.>단비가 연일 내리니 전야의 갈증이 웬만큼 풀릴 것 같다. 한강 촌사에 계속 머물러 있는데 박만발이 와서 얘기하다 돌아갔다.

<5월9일(생략)>

<5월10일(생략)>

<5월11일 비가 오다.>한강 촌사에 머무르며 언계원단과 별단의 손질을 끝내었다.(암행어사가 그 직무 수행을 끝마쳤을 때 즉시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국왕옥에게 직접 복명해야 한다. 그 복명서가 바로 서계와 별단이다.
「서계」는 각 고을 수령의 행정감독에 관한 사항을 기록해 올리는 것으로 암행어사의 주된 임무에 속한다. 그래서 이것을 「원단」이라고도 한다. 그 조사하고 처치한 내용을 설명함은 물론 미처 처분치 못한 사항에 대해선 중앙관서의 각 부처에 명하여 조처하게 한다.
「별단」은 행정감독 이외의 사항에 관한 것으로 말하자명 「별드의 서계」란 뜻이다. 엄밀히 말하면 모두 행정조치로 처리될 성질의 것이지만, 직접 수령의 비원사실 보다는 민정에 관한 복명서이다. 즉 제도적인 폐단이라든가 관습상의 문젯점 등을 지적하고 있다.
국왕은 서계와 별단을 받으면 그것을 해당 부처인 본조에 회부하여 검토시킨 뒤 사실의 해명과 재조사를해 복계를 제출케 한다. 암행어사의 복명서는 대체로 각 본조에서도 그대로 인증되는게 통례지만 더러 복명서와 견해를 달리할 수도 있다. 복명서에 대한 재검토의 여유를 갖는 것은 암행어사제도 자체의 불신이라 해석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칫 사감이나 그릇된 판단을 우려하는 신중성에서 비롯된 것이겠다.
만약 재검토·조사한 바에 의하여 특명서의 내용이 아주 정당치 못한 것이었다고 판명났을 때는 파면시키든가 죄과를 추궁한 예도 없지 않았다. 숙종2년에 암행어사 이인환이 체포되어 심문을 맡은 사례도 없지 않은 것이다. 특히 당쟁이 치열한 시기에는 그에 관련된 부작용도 없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반대로 그 공로를 인정받아 영전의 기회를 얻기도 하였다.)

<5월12일 비가 오다.>대궐로 나가 복명 조반 후에 대궐로 나가 복명하였다. 내가 어사의 사명을 띠고 출관한 뒤에 왕명에 의해 군기감 정(정3품·당하관이므로 정4품 시청관으로 부터 2계급 특진이다. 그러나 뒤에 종 3품·성균관 사성을 지내었다)에 임명돼 있었다. 그러나 사은하고 물러 나왔다.

<【추기】>
동계 박만정의 암행일기는 복명으로 끝이 났으나 이 책에 잇대어 그의 복명서에 대한 호조의 복계 내용을 동문필사해 수록했다. 즉 그는 자신의 조사하고 지적한 바에 대한 행정부의 반응을 예의 주시하였음을 입증한다.
그런데 복계의 내용은 박 어사의 지적한 바가 거의 긍정적으로 받아 들여지고있으며, 그에 따라 시정할 것을 품신 함으로써 그 뒤 주장이 십분 관철됐다고 보아진다.
또 「숙종실록」에 의하면 박 어사가 매우 규탄한 백천 군수 이동형, 신계 현령 심릉, 송화현감 김해는 각각 잡아다가 죄상을 문초하였다.

<품신대로 거의 조처>
백천 군수는 군내 부민들을 초대해 술자리를 벌이고 곡창을 강징하였으며 백정들에게 중형을 가했던 수령이다. 신계 현령은 여러모로 무단히 곡식을 가징해 모두 횡령한 죄목이오, 송화 현감은 백성들에게 마구 형장을 가하고 관곡을 사사로이 남용, 구휼에 부실했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연안부사 이관주에게는 치적이 모범이 된다하여 비단까지 하사하였다고 실록에 기록돼 있다.<끝><이봉내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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