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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3)<제자 윤석오>|<제26화>내가 아는 이 박사 경무대 4계 여록(110)|장기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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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 박사와 맥아더 원수>
체신장관으로 입각하면서부터 나는 다시 이 박사를 가까이 서 모시게 됐다.
이젠 국가 최고통치자인 대통령과 그를 보필하는 각 원의 관계에서. 나의 입각은 전연 뜻밖이었다. 49년 1월의 조병옥·장 면·김활란·김우칭 씨와 현재 국회의원으로 있는 정일형·모윤숙씨 등과 함께 대표단의 일원으로「유엔」총회에 다녀오자 마 자 나는 이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경무대에 들어갔다.
이 대통령은 미리 내정을 해놓고 있었던 듯 체신을 맡아 수고해 달라고 통고하는 것이 아닌가. 이래서 나는 고 김도연(재무), 허 정(교체)씨와 함께 국회의원으로서 장관을 겸임하게 되었다. 이대통령은 지난날의 친분 때문인지 어느 때고 경무대에 드나들라고 분부했지만, 나는 결재와 회의 등 필요한때만 대통령을 뵈었다. 다만 결재만은 어느 장관보다도 나의「패스」율이 좋았다.
이대통령은 큰 계획을 상신 하면 대개 일단 재고하도록 되돌리는 경향이었다. 그러나 나는 한번 마음먹은 일은 몇 시간이 걸려도 차분하게 설명해서 가부간 결말을 짓는 성미였다. 그래서 이대통령은 어떤 때는 귀찮아서도『장 장관은 고집이 세니까 안 들어줄 수 없지』라면서「사인」했다. 대가 경무대에 자주 드나들지 않은 이유는 이대통령의 귀중한 시간을 아끼는 뜻이 컸지만, 비서진의 거드름을 보기 싫은 점도 있었다.
내가 장관을 그만 두었을 때의 일인데 이대통령이 한대 폐렴을 앓은 일이 있다. 이 소식을 듣고 경무대 비서실에 전화를 걸어 간병할 시간을 대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비서실에서는『시간이 없다』는 등의 핑계를 대어 따돌리는 기세가 역력했다.
그 뒤 이대통령의 생신에 가서『몸이 편찮으시냐』고 인사하니까,『그 동안 많이 앓았어』하면서 찾아주지 않은 것을 섭섭해하는 표정이었다. 『비서실과 연락이 잘 안되어 찾아 뵙지 못했다』고 말하자, 또 안면근육을 움직이시며『이런 딱한 노릇이 있나, 내가 알았어야지』라고 비서 진을 나무랐다.
다시 내가 입각했을 때로 돌아가서 반공연맹이 창설되던 때를 회상하고자 한다.
이대통령의 환 국 초기「슬로건」이『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이대통령은 정부 수립 후에도 국민이 단합하고, 나아가서「아시아」의 자유진영이 대동단결 해야 공산주의를 이겨낼 수 있다고 역설하곤 했다.
49년 초여름으로 기억되는데 이대통령은 자유중국의 장개석 총통을 초청했다.
나는 2년 전 미국으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상해에서 융 승한 대접을 받은 데 대한 답례로만 생각했었다. 물론 이런 뜻도 없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이대통령은 극동의 반공체제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장총통과 의논할 필요가 있음을 느꼈던 것 같다.
이대통령은 장 총통 일행을 진해별장에 초대하여 우선「파티」를 베풀고 대륙에서 대만으로 밀려난 우방의 원수를 위로했다. 이때 장 총통이『이 대통령은 나보다 열 한살이나 위인데 건강은 더 좋은 것 같다』고 인사했으며, 이 박사는『장 총통은 하루속히 본토를 수복하고 우리도 북한실지를 되찾아야겠다』고 말한 것이 기억난다.
이대통령과 장 총통은 이때 공통의 적인 공산주의와 대항하기 위해 아주 반공연맹을 결성한다는데 의견을 같이 해서 반공연맹이 창설된 것이다.
「6·25」때의 일이 한가지 생각난다. 부산 피란 시절인데 하루는 경남지사 관저에서 긴급 국무회의가 소집되었다. 회의를 주재하던 이대통령은 전세가 호전된 것을 크게 기뻐하면서 갑자기 다음날 중앙청에서 환도 식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대통령은『내일 아침에는 평소 출근하는 것 같이 자연스럽게 나와 모두 수영비행장에 집합하라』고 지시했다. 몇 대의 군용기로 김포에 가서 일본에서 날아오는「맥아더」사령관을 맞아 환도 식을 갖기로 했다는 설명이었다. 이 같은 계획을 말한 다음 이대통령은『이 사실을 부인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러자 어느 장관이 별안간 나서서『비서는 어떻게 합니까』고 물으니까, 이대통령은 『식모까지 데려오지』라고 받아넘겨 조용하던 회의장에 폭소가 쏟아진 일이 있다. 긴박한 전쟁 중이었지만, 이대통령에게는 언제나 이런「유머」가 있었다.
이 박사와「맥아더」원수와는 각별히 가까운 사이였다. 중앙청에서 환도 식을 한 후 이 박사는「맥아더」사령관에게 훈장을 주려고 했으나 전쟁 중에 갑자기 만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종이로 된 훈장증서만 수여한 후 나중에 내가 특사로 일본에 가서 훈장을 전해준 일이 있어 두 분의 관계를 비교적 잘 알고 있다.
훨씬 뒤의 일인데 이박사가 하야한 후「하와이」에 있을 때 나는「뉴요크」의「팬 하우스」에서 요양중인「맥아더」장군을 문병한 일이 있다. 이때 내가『평민으로 한국을 방문해 달라』고 초청하니까, 그는『「하와이에 있는 이 박사를 모셔 가면 나도 가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 뒤「하와이」에 들러 이 박사에게 이 말을 전하니까 눈물을 홀리며 우정을 고마워하던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 <계속>
(다음은 문교장관을 지낸 최재유씨의 글을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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