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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문학평론가>|문학적 탐구영역의 확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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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조잡한 군대생활이나 사창가만을 즐겨 그리던 한국문학이 그 탐구의 영토를 점점 더 넓히고 있다는 증거를 한국문학은 몇 연내에 계속 보여주고 있다. 그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오승재·박시정·유재용·조해일씨 등이 새로 개척하고 있는 이국에서의 한국, 혹은 한국에서의 이국과 최인훈·서기원·이청준·박태순·최인호씨 둥이 천 작하고 있는 지식인과 현실과의 상관관계, 그리고 이문구·황석영씨 등이 깊은 관심울 보이고 있는 노동자계층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세 양태는 어떤 의미에서는 현재의 한국사회가 내포하고 있는 여러 가지 갈등과 모순의 집약적 표현이다. 이번 달만 하더라도 그런 세 양태를 여러 소설들이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조해일씨『아메리카』(세대)는 한국내의 이방지대인 미군부대주변의 한마을의 풍속을 돌연한 틈입자의 입장에서 담담하게 묘사해 간다. 그러나 씨는 그 담담한 묘사를 통해 그곳에서 사역되고 있는 양공주들과 포주들과 일꾼들의 겉보기엔 그럴싸한 소비생활 밑바닥에는 흔히 생각하듯이 그렇게 짙은 허무의식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삶을 삶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것에 대한 분노와 저항이 또한 깔려있다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삶에 뿌리박지 못한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그 어떤 문자보다도 여실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그곳에서 어느 정도의 휴식을 취하려고 한 <내>가 성애의 즐거움에서 점차로 삶에의 의지를 확인해 가는 과정으로 소설화되어 있는데 그 주인공의 의식에 결정적인 흠집을 남긴 것이 흑인에게 살해당한 양공주를 위해 자기는 아무 것도 해주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자각이다.
그 자각이야말로 그를 성애의 늪에서 이끌어내 삶의 그늘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진면목을 보게 만든 충격적 사실이다.
『전락』의 주인공과는 반대로 그는 그 자각을 통해 삶과 그 삶을 이루는 비참한 부분들을 동시에 수락한다. 용기 있게 삶을 살아간 사람들에게도 그들의 몫이 있듯이 <천하게 비겁하게 살아남은>자들에게는 고난의 몫이 있다는 것을 그는 뚜렷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신인으로서 씨는 최인호·황석영씨와 함께 가장 기대할 수 있는 작가이다.
서기원씨의『동학난리』(월간문학)는 씨의 최근의 일련의 작품을 읽어본 독자들에게는 기이한 소설처럼 여겨질 것이다. 현실의 모순과 갈등을 지적으로 완벽한 소설 공간 속에 조형함으로써 충격을 준 작가가 그래 고작 고대 소설 류의 영웅담이란 말인가?
그러나 이러한 질문은 씨의 소설을 다시 주의 깊게 읽으면 그 많은 부분을 포기해야 하게 된다. 이 소설에서 씨가 말하려고 하고 있는 핵심적인 부분은 그 영웅담을 듣던 소설가가 그때의 심정을 묘 파한 <그제 껏 차차 윤곽이 잡혀가던 동학혁명의 형 극이 별안간 망가지는 것 같아 약간 당황하고 있었다>는 대목이다.
그 대목을 삽입함으로써 씨는 씨가 노린 것이 동학혁명의 본질도 아니고 이조 후기사회의 폐쇄성도 아니라, 한 중요한 사건이 후대에 오면서 얼마나 짙게 동화적으로 윤색되어 버리느냐를 제시하는데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 중요한 사건이 그것을 이룩한 자들에 의해 개인적으로 그리고 피부 적으로만 이해되어버리고 마는 그 악순환이 씨의 지식인으로서의 소설가를 당황하게 만든다. 그것을 씨의「엘리트」주의라고 간단하게 비판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엘리트」주의의 비극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서씨의『난리』와는 대척 적인 위치에 서 있는 것 같으면서도 결국은 같은 결론에 이르는 작품이 백시종씨의 『축축한 화기』(지성)이다.
그곳에서 씨는 치매의 한 장년주인공을 내세움으로써 현실의 모순을 그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주인공의 그 치매상태야 말로 소설가 자신이 현실에서 받는 박해의 이면이다. 지식인으로서의 씨의 불행은 모두가 그 소설의 주인공과 같이 치매상태에 빠질 수 없다는데서 오지만, 역설적으로 씨의 소설가로서의 승리는 모두가 그런 상태에 빠져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는데서 오는 것이다. 범 막한 사건묘사와 장면처리는 이 작가가 찾아낸 씨 자신만의 몫이다.
위의 세 소설 외에도 주목에 값하는 소설들이 있다. 위 당과 육 당의 우정을 그림으로써 난세를 살아나가는 두 인물로 그들을 전형화 시킨 조용만 씨의『이 두 사람』(현대문학), 항심을 발견할 수 없어 방황하는 대학교수를 그린 이범선씨의『정교수의 휴강』(동), 농촌소년과 도시처녀의 비극적 사랑을 현대적 감각으로 처리한 박용숙씨의『견우와 직녀』(동), 이 땅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 결국은 그것을 포기할 수 없음을 느끼는 한 의식 있는 학생을 묘파 한 김원일씨의『빛의 함몰』(월간문학), 그리고 의로운 노인과 흑인소년과의 사귐을 서정적으로 그린 유재용씨의『추정』(동), 일제하의 기숙사에서의 학생관계를 다룬 하근찬씨의 『32매의 섭 서』(월간중앙) 등이 그렇다. 특히 조용만씨의『이 두 사람』은 난세에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중 차 대한 문제를 육 당 사건을 통해 박력 있게 제시하고 있어 주목을 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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