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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2)-Y부대①유격전(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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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반만년역사를 이어오는 동안 숱한 국난을 당했을 때마다 흔연히 일어섰던 의병의 후손들은 6.25전쟁 때도 분연히 일어나 싸웠다.
지하에 숨어 활약하던 수많은 북한의 반공애국청년들은 국군의 북진과 더불어 각종 청년단체를 조직, 치안을 확보하며 패주하는 적을 섬멸하기도 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유엔군이 후퇴하게 되자 이들 청년들은 일부는 연안도서나 산 속으로 들어가 결사항전을 계속했고 일부는 실향의 한을 품은 채 남하하고 말았다.
이들의 전과는 정규군에 비해볼 때 미미한 것이었을지 모르나 그 정신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점령군에 항거해 싸웠던 프랑스의 레지스탕스들에 못지 않았다. 이들은 군번도 계급도 없는 초라한 피난민의 신세였지만 실지가 된 내 향토를 하루속히 수복해야겠다는 집념과 열의는 누구보다도 강했다.
이 같은 북한출신 반공청년들은 곳곳에서 출신지역별로 규합해서 유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군번도 계급도 없이 사기충천>
훈련과 장비가 거의 없었던 이들의 초기유격전은 출신지역을 드나들며 적 후방 행정질서를 교란시키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국군정보장교나 「유엔」군과 접선이 되면서부터는 필요한 장비도 갖추고 산발적이던 조직도 점차 통합 확대케 됐고 대담한 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951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 동·서해안 유격부대들의 작전은 정규전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동해안일대서는 Y부대가 주한 「유엔」군 연합고문단사령부(JACK)의 지원을 받으며 조직적인 유격전을 전개했고 서해안 일대서는 분투해오던 구월부대·백마부대 등이 백상도 미 극동군 표 작전기지 사령부 「동키」부대에 통합되면서 본적인 작전을 벌였다.
이들 유격부대들은 적 후방 보급로 파괴·후방 민심교란·토벌대의 병력증강에 따른 적 일선 병력의 약화 등과 같음 일반적인 유격작전은 물론 중요한 전투정보의 입수나 지하에 숨어있던 많은 반공인사들을 구출해 내오는 등의 일도 했다.
무명의 유격대원 용사들은 조국을 통일하고 실지를 탈환해야겠다는 일념뿐이었으며 지위나 신분보장 같은 것을 문제시하지 않았다.
대원들은 또 모두가 하나같이 「결사」를 각오하고 앞을 다투어 출동하려 했을 뿐 일체의 논공을 따지지도 않았다.
1951년 4월부터 동해안 일대에서 치열한 작전을 벌였던 Y부대는 단기간이나마 유격에 필요한 제반훈련과 교육을 받았고 장비도 갖춘 부대였다.
1.4후퇴 때 남하한 함경남·북도와 강원도출신 반공청년들로 편성된 Y부대는 부산영도에 본부기지를 두고 공중과 해상으로 8백 여명의 대원을 침투시켜 본격적인 유격전을 벌였다.
월등한「유엔」군의 제해·공권을 십분 이용해 험준한 산악 깊숙이 거점을 확보해 기습전을 벌이기도 했고 때로는 중과부적으로 적에게 쫓겨 밀림을 헤치며 수백리 씩 피 눈물나는 「장정」을 하기도 했다.
이북 동해안 전역에 걸친 Y부대의 유격전이 치열해지자 북괴군은 급기야 전선병역 수 개 사단을 동해안 유격대토벌에 빼돌리기까지 했다.
그밖에도 산간취약지구 독립가옥을 이주시키고 소위「오가작통」이란 것을 만들어 우리 유격대의 활동을 저지하려고 안간힘을 썼었다.
아직까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Y지구부대는 명실공히 결사대로서 많은 전과를 올렸고 대규모적인 작전을 전개했었다.
그러면 당시 Y부대원들의 얘기를 들어보겠다.

<북의 지하운동동지들과 접선>
▲한철민씨(당시Y부대장=육군소령·예비역육군중령·현 사업·56세) <나는 1945년10월 월남해 민주의원 비서국에서 이승만 박사를 모시고 일하다가 49년1월 육사8기 특별4반에 입교했읍니다.
임관 후엔 동두천파견대장으로 근무하면서 북한출신 옛 동지들과 대북 정보활동을 했어요. 6.25가 발발해 육본이 대구로 내려갔을 때 나는 장도준 정보국장을 찾아가 무기와 장비를 주면 내가 가지고 있는 지하조직을 동원해 유격전을 벌여 보겠다고 간청했어요.
결국 허락을 얻지 못해 이 계획은 좌절됐고 나와 같이 북한에서부터 반공투쟁을 해온 오종호·박성만·김태은·한수신·황보현·박강권·황종우·유재복(전사) 등15명의 동지들은 부산으로 내려갔습니다.
나는 7월26일 안의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됐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해 부산 고 욋과병원에 입원을 했었어요.
하루는 윤치영씨(전 공화당 의장서리)를 만났는데 주한「유엔」군 연합 고문단사령부(JACK) 서 나를 좀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면서 가보라고 합디다.
고문단사령부를 찾아갔더니 한 미군고문관이 협력을 해줄 테니 「특수작전」을 해볼테냐는 거예요. 아마 JACK에서는 유격전을 구상하고 한국군의 책임자를 물색 중이던 모양입디다.
전부터 나를 중심으로 뭉쳐있는 15명의 동지들과 유격전을 해보려던 나에게 마침내 기회가 온 거였지요. 나는 주저 없이 즉석에서 미 고문관의 제의를 수락했읍니다.
이날부터 나는 양호단·북조 연맹 출신 북한반공청년들을 규합해 아직도 북에서 지하운동을 계속하고 있는 동지들과 접선하면서 일대의 유격전을 벌여 볼 꿈에 부풀었어요.
우선 부산 서면 포로수용소 옆에 천막을 치고 15명의 동지들과 부대를 편성했읍니다.
9월 하순 고문단과 협의해 우리 JACK부대원 15명을 모두 특수 교육 차 일본 아기미군 유격전훈련 캠프로 보냈어요.

<부산영도에 총본부기지 설치>
북진과 동시 나는 원산으로 올라가 반공청년들을 규합해가며 장차의 거점을 마련키 위해 동분서주했어요.
l·4후퇴로 다시 부산으로 내려와 일본에서 돌아온 15명의 동지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부대를 확장하기 시작했읍니다.
51년1월21일부터는 거제도 장승포에 99수용소를 설치해 놓고 흥남 철수 때 내려온 함남, 북과 강원출신 반공청년들을 규합했어요.
수 없이 몰려드는 지원자들을 엄격히 심사해 합격된 자는 부산서면 캠프로 건너보내 훈련을 받게 했어요.
입대한 대원들 중에는 15∼16세의 중학생도 있었고 고아원에 맡겨놓고 들어온 56세의 노인도 있었어요. 입대를 만류해 봤지만 그들의 반공투쟁의 정열만은 도저히 꺾을 수가 없더군요.
2월초부터는 일본에 갔다온 15명이 교관이 돼 각 출신지역별로 부대를 편성하고 본격적인 훈련을 시작했습니다. 2월초일 서면 「캠프」로는 계속해 들어오는 대원들을 도저히 수용할 수가 없어 부대를 영도로 옮겼어요 이때부터 영도(Young island)의 영문 머릿자 「Y」를 따 우리부대를 통상 Y부대라고 부르기 시작했어요. 영도는 부대가 해체될 때까지 대원들을 훈련하고 모든 작전을 지휘하는 총본부기지로서 우리들의 요람지였습니다.>
다음은 Y부대 1기간요원으로 활약했던 대원의 얘기
▲미동훈씨(당시Y부대본부정보참모·현 사업·51세) <하루아침에 피난민 신세가 돼 망향의 한을 씹으며 북진의 날을 고대하던 동해안출신 반공청년들은 jack부대에 앞을 다투어 지원했어요. 나는 1월 하순 제1기로 입대해 훈련을 마치고 본부서 정보를 맡아봤읍니다.< p>

<기간요원 일본 보내 특수훈련>
2월 중순에는 기간요원이 될 1백50명의 대원과 무전사 50명을 일본으로 보내 특수훈련을 받게 했어요. 계속해 들어오는 신인대원들은 영도 교육 대에서 총검술·투하훈련·유격훈련·폭발물 사용법 등을 비롯해 독도학·정보학·심천학·정치학·기상학 등의 유학 전에 필요한 제반훈련과 학과교육을 단기간이나마 조금씩 모두 시켰어요.
51년4월에는 대원이 1천2백 여명에 달했습니다. 대원들은 무전사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함남. 북과 강원도 출신들이었어요.
영도의 부대규율은 아주 엄격했어요. 영도는 우리 Y부대가 들어가고부터는 일체 외부인의 출입이 통제됐고 대원들도 외출이 금지돼있었어요.
한번은 장관급 인사 4명이 일요일에 낚시를 하러 들어오다 보초대원과 시비 끝에 무릎을 끓고 기합을 받았어요.
이승만 대통령이 영도 앞 바다에서 낚시를 하는데 옆에서 폭파훈련을 했어요. 대노한 이 박사는 미국사람 그늘에서 오만하게 노는 자들이라고 호통을 치면서 부대간부들을 모두 엄벌하라는 명령을 내려 교관6명이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진 일도 있어요.
대원들은 아무런 신분증도 없었고 다만 자체에서 사용하는 군번이 있었는데 공용으로 외출을 했다가 타 기관의 검문을 받는 일이 생겨도 절대로 정체를 못 밝히게 돼 있었어요. 입대와 동시 이름은 모두 가명을 쓰게 하고 각 부대간의 횡적인 접촉도 일체 못하게 했습니다.
영도의 훈련이 끝난 후에는 양산·태백산 등지의 공비토벌 전에 참가시켜 실전을 체험케 했어요.>
◇주요일지(1951년11월16·17일)
※11월16일 ▲극동공군 북한 심부의 철도파괴 ▲미8군 법무부장, 공산군은 미군포로 6천2백70명 학살했다고 발표 ▲태·이태리·화란·희랍 등 4개국 증원부대 부산 착 ▲휴전회담 제29차 합동분과위원회
※11월17일 ▲공산군, 연천 북방서 영 제1사단공격 ▲휴전회담 제30차 합동분과위 ▲유홍 의원 등 10여 의원 내무장관진퇴에 관한 서면질문 ▲「애치슨」미 국무장관, 「유엔」정치위원회서 한국휴전언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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