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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의공탑 창의의 고장 경남 단영에 세워지다|겨레 지킨 임란의 병장 곽재우 등의 넋 기려|글 이종석기자, 사진 구태봉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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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후손들의 타성 어린 결정
3백80년 전 임진왜란으로 이 땅이 초토가 될 때 맨 먼저 횃불을 드높인 창의의 고장 경남 단영에는 다시 그 후손들의 정성으로 기념비가 드높이 쌍아 올려졌다. 비를 이름하여 의병탑. 높이 27m의 이 돌탑을 세우기 위하여 군민들의 자력으로 2천3백여만원을 모금, 6월3일 그 준공을 보게 된 것이다. 국고의 보조나 관의 뒷받침에 기대지듯이 오늘날에도 스스로 우러난 뜻과 힘을 모아 옛 얼을 기리는 표적을 세워놓은 것이다.
의령읍 남산아래 짙푸른 수풀을 배경 하여 우뚝 선 이 탑에는 의병장 곽재우를 비롯해 윤탁 박사제 오협 이운장 배맹신 심대승 정연 권당 정질 허언심 여순 강언용 허자대 심기 일 안기종 조사남주 몽룡 등 휘하의장 17명이 이름을 가지런히 새기고 그들을 받들어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
『동포들이여 만일 겨레의 얼과 정기를 지키려거든 위병의 정신을 배워라. 동포들이여, 또 만일 조국의 수호와 독립을 원하거든 의병의 행동을 본받아라. 여기 우리가 따라야 할 의병의 넋이 영원히 살고 있다』
이 고장 사람들에게는 수 백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옛 정기가 절절이 베어 흐르고 있겠으나 다시 역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들추어보아도 여기 팁이 서는 까닭이 명백히 기재돼 있음을 본다.
『왜적이 처음 도착했을 때 봉기하는 자 한사람도 없음을 괴이하게 여겼다. 이것은 난리가 불의에 일어났고 또 장수들이 도망한 때문이었다. 백성들은 어육이 돼 살아 나가길 바랄 수 없었고 창고는 온통 잿더미 화하여 손댈 여지가 없었다.
내가 서(의주)로 옮긴 뒤 남쪽으로 기대는 전혀 무망했었다. 그러나 뜻밖에 너희들이 의병을 일으켜 용전함을 소식 들으니 기쁘기 그지없다. 백성들한테 긁어모은 창고의 곡물은 어떻게 하고 주먹밥으로 군량을 삼으며 병기창의 무기는 어디 두고 대나무를 꺾어 궁창을 만들었단 말인가.
정암나루에 깃발이 날리며 도망하는 왜적이 넋을 잃고 무계에서 칼을 휘두름에 흐르는 송장이 강을 덮었다. 관군은 어찌 그다지도 쉽사리 무너지며, 의병은 어이 줄기차게 이기는 고 법을 겁내는 관군임에도 법이 잘 시행되지 않았는데 의병은 충의로 결합된 까닭에 결코 퇴각을 몰랐던 것이리라. 애초에 성을 쌓던 노력으로 민력을 기르고, 장수의 녹봉을 덜어 민폐를 경감했던들 동래 펄이 시체로 덮이지 않았겠고, 한도와 평양성이 왜적의 발굽아래 더럽혀지지 않았을 것을...』
임진왜란을 겪고 선조가 친히 경상도 의병을 격려한 글의 한 대목이다. 정암 나루의 깃발은 의령 곽재우가 이끈 의병의 일컬음이요, 무계의 칼은 고령의 김면과 그 이병을 가리킴이다.

<신출귀몰했던 홍의 장군>
1592년 4월13일. 20만 대군의 왜적은 부산에 상륙한지 20일만에 천리 길을 내달아 수도 서울까지 꿰뚫고 북으로 휘몰아쳤다. 왕은 이미 의주로 쫓기는 신세가 되었고 장군은 곳곳에서 파죽지세. 일전을 겨뤄 보기도 전에 흩어지는 예가 허다했다.
그러나 왜적이 침입한지 불과 10일 뒤인 4월22일. 경상우도 의령에서는 초야에 묻혀 살던 한낱 선비가 분연히 일어났다. 처음엔 가노 10여명을 데리고 놔와 마을 장정들을 모으고 다시 인근 군. 현을 통틀어 5백여 의병을 규합했다. 스스로 붉은 비단으로 군복을 지어 입고 앞장서니 이가 홍의 장군 망우당 곽재우이다. 신출귀몰하는 전술로 적을 물리쳐 왜적이 하늘이 내린 장수라 일컬어 천강 홍의 장군을 두려워했다.
홍의 장군의 굳건한 저항으로 의령·삼가·합천 각 읍이 회복됨에 따라 회복됨에 따라 낙동강 .이면. 석도는 자연 그의 비호아래 들게 됐음은 물론, 특히 이에 자극돼 각처에서 의병이 잇달았다. 5월에는 합천에서 정인홍 고령에서 김면이, 또 7월에는 삼가의 박사제 형제, 대구의 서사원, 범성의 권세춘, 창령의 신방즙, 성천희 의병이 합세하여 곽 장군의 휘하에 들어 서로 힘을 모은 것이다.
이들 경상도의병의 활동은 도처에서 왜군의 후방을 찌르고 왜적이 전라도로 진입하는 것을 막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옥천에선 조헌, 공주에선 승영규, 장흥에선 고경명, 해남에선 승처영, 광주에선 김천일, 담양에선 김덕령이 각각 의용병을 모아 죽음을 무릅쓰고 저항하니 끝내 호남일대는 적의 손아귀에 넣지 않고 보전할 수 있었다.

<충성과 전술로 왜적 무찔러>
의병장 곽재우는 싸움에 물러선 일이 없다. 적을 만나면 반드시 싸우고 싸우면 반드시 물리치고야 말았다. 의병은 맨주먹이라 수적으로나 무술 면에서나 왜적의 대군과 맞싸울 형세가 못되었지만, 그는 충성으로 싸움에 임하고 전술로써 적을 누르며 의로써 진중의 사기를 돋웠다. 그는 자신의 전과를 드러내 치하 받으려 하지 않고 오직 내 나라 내 땅을 지키는 데만 온 힘을 다한 것이다.
그는 제 한 몸만 생각하고 도망치는 관군을 가장 증오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경상도 순제 사 김오. 이에 이르러서는 단연 목을 베어 본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함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모반이란 모함을 받기도 했다.
망우당은 이때 나이 41세 그의 전공으로 벼슬이 주어졌지만 사퇴했고 정서재난엔 방어사로 종군했음도 전후에 내린 벼슬을 모두 마다하고 상소로써 보답하며 강호에 묻혀 여생을 마쳤다. 진정 그의 평생은 떳떳하고 의로운 선비요 의병이었다.<글 이종석 기자. 사진 구태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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