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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보우대사(이조)|김동화(동국대대학원장·철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이조시대뿐 아니라 불교전래 1천6백년동안 불교의 교명 유지에 가장 많은 공헌을 한 사람으로서 이름도 모를 포도에게 목숨을 빼앗기고만 인사가 있으니 그는 허응당 보우대사였다.
불교로서는 이러한 유공자가 과거에도 그다지 흔했던 일이 아니요, 또 미래에도 있을까 말까한 대사인 만큼 다른 단체는 그만 두고라도 불교자체 안에서 만이라도 그 진상을 규명하여 몰지각한 당시 유생배들의 음모에 설원을 해주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몰후 4백 여년에 이르는 오늘날까지 이 나라 불교도로서 한사람의 애도자도, 그 진상의 규명자도 없으니 이 얼마나 무성의하고 무관심한 일이란 말인가
보우대사(1566년 인적)의 시종을 전하는 온전한 기록은 없고 다만 단편적인 기록을 주워 모아 본다면, 그는 금강산 마가연암에서 15세에 체발한 후 주로 금강산의 각사암에서 수업하였던 것 같다.
그러면 그의 스승은 누구였던가 아마도 지행이라는 한 무명승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대사 자신이 남긴 시구에 의하면 『나는 일찍이 대장경을 다 보았고 이제는 정히 주역을 읽는다』라고 하였으니 내외서에 두루 통했던 것 같은데 그의 유문으로 보아 사실 그러했던 것 같다. 또 『6년에 좌단금강정하고 의마심원자재력』이라 한 것으로 보아 도력에 자신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사는 명종5년에 문정왕후의 지우를 얻어 동6년(1551)에 선교 양종제와 양종 승과제를 부활시켜 동왕20년까지 이 나라 불교계의 일대 지주가 되었었다. 그리하여 명종9년(1554)10월15일께 선종초시선불장방을 발표하였으니 그 결과로 서산 사명 승과에 입적하여 그 다음대의 불교명맥을 이었던 것이다.
당시 이 나라 불교는 선교 양종으로 양립되어 승과를 보는데도 양종을 각시 하였다.
보우대사는 선종판사가 되고 수진대사는 교종판사가 되었다. 이로써 보다면 보우는 선종이 전문이라 선종만을 주로 하였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전대의 보조는 정서쌍수. 선교일치사상 이었지만 이제 보우대사는 진일보하여 교선일체를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선시자 불심이요, 교시자 불어라, 심구는 필부위니 선교가 하증이리요』라든가 또 『교즉시선선즉교, 빙응원수수원빙, 욕지선교진무이 인댄 간취교수미최상층 하라』와 편은 일치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원래가 일체인 것이라고 적극 주장하였던 것이다.
편교를 양종으로 나눈 것은 원래 불교자체가 한 것이 아니었다. 국강서 재정긴축정책이 일환으로 양종에 통합·흡수한 것인데 승려들의 좁은 종아집은 드디어 구수같이 대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대사는 부득이 국가정책에 순응하기는 하지만 내심 교선상자하는 것이 불타교설의 참뜻이라는 견지에서 당시 선교양종이 서로 우열 심천의 암투가 있는 것을 융화시키기 위해서도 이러한 태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끝으로 우국정성을 본다면 대사의 시에 『우종심』이라는 구절이 있다.
『만약 불교가 쇠퇴하면 따라서 국가도 쇠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불교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국가를 사랑해서 불교의 쇠퇴를 근심한다』는 우종 애국의 정을 동시에 토로한 것이다. 그리고 또 그 당시 왜변이 있으리라는 소식을 듣고 지은 시에 『율신수미부간과나 충관이 횡천함을 부종하』운운의 사건이 있다. 이때 조정의 유신들은 태평성대를 부르짖고 당쟁만을 일삼던 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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