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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2) <제자는 윤석오>|<제26화> 경무대 사계 (89)|김상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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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항간에는 이 대통령이 구 황실을 홀대한다는 비난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대통령은 『구 황실분들이 체통을 유지할 수 있도록 정부에서 도와드리라』는 말을 자주 했다.
53년부터 7년간 구 황실 재산 사무 총국장을 한 윤우경씨의 얘기를 들어보면 이 대통령이 윤 황후를 비롯한 황실분들의 생계에 신경을 많이 썼고 피난 시절에는 윤비를 만찬에 초대도 했다.
부산 피란 시절에 정부는 윤 황후에게 월 1만환씩 생계비를 지급했다. 윤 국장이 보기에도 너무 부족한 것 같았다.
그래서 대통령께 『윤 황후의 생계비가 적으니 더 드려야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 박사는 즉석에서 찬동했다.
『그분이 우리 나라에서 가장 불쌍한 분이야. 대우를 잘해 드려야 하네. 근래 얼마씩이나 드리면 되겠나.』
『매달 5만환은 있어야 겠읍니다.』
『그래, 그럼 서류를 갖춰 오게.』
며칠후 대통령은 윤 국장을 다시 불렀다.
『이봐, 매달 생계비를 드리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그러니 연간 쌀로 정해서 물가가 오르더라도 자동적으로 생계비를 올려 지급하도록 하세.』
대통령의 지시로 윤 황후의 생계비는 연간 벼 2백 석으로 정해졌다.
그 이외에 연료비·김장 값 등은 따로 지급 됐으며 윤 황후의 경우는 고용인에게 사무 총국에서 별도로 월급을 주었다.
이 밖의 황족으로는 의친왕에게 연 벼 1백20석, 고종의 후궁인 광화당과 삼축당에게 벼 70석씩이 생계비로 지급됐다.
물론 생계비로 지급되는 쌀은 그때의 쌀 시세에 따라 현금으로 바꿔드렸다.
이런 것을 보더라도 왕실 홀대란 얘기는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 밖사는 우리 나라가 민주 국가로 바뀐 이상 구 황족이라해서 국유 재산을 개인 집으로 쓰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을 가졌다.
윤 황후는 1·4 후퇴 때는 피란을 했으나 6·25 직후에는 서울에 남아 고생했다. 창덕궁이 과거를 생각나게 하고 또 6·25때 고생을 해서인지 윤비 자신도 창덕궁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얘기를 자주 했다.
윤비의 의견과 이 대통령의 생각이 우연히 일치한 셈이다. 그래서 환도 후 이 박사는 윤 국장에게 윤비가 사실 집을 물색해 보라고 지시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개인이 공직 없이 국가 재산을 개인 집으로 쓸 수는 없어. 다행히 윤 황후께서도 창덕궁에서 사시기가 싫다고 하시니 사실만한 곳을 물색해 보게.』
윤 국장은 안국동 별궁을 후보지로 물색해 대통령께 보고했다.
이 박사는 직접 장소를 보고 싶다고 나서 윤 국장과 안국동 별궁을 돌아봤다.
별궁 안을 둘러본 이 대통령은 마땅치 않아 했다.
『여기는 안 되겠어. 내가 백낙승이에게서 받은 별장이 있으니 정릉으로 가보세.』
그래서 이 대통령이 백 사장에게서 받은 정릉 별장이 윤비의 거처가 됐다.
이곳이 인수재다. 이 대통령은 이곳을 윤 황후가 사실 거처로 정하면서 윤 국장에게 『이곳에서 생전 사시도록 하게. 백 사장이 내게 줬지만 나는 받을 맘이 없어. 그러니 무료로 쓰신 뒤 윤 황후께서 돌아가신 후 백사장에게 돌려주게』-.
윤 황후는 부산 피란지에서 인수재로 오면서 『창덕궁은 보기도 싫다』고 해서 을지로를 거쳐 정릉으로 갔다.
윤 황후가 인수재에 들어간 뒤 그해 11월 「닉슨」 미 부통령이 내한했을 때 이 대통령은 인수재에 「닉슨」 부통령을 데리고 가 윤 황후를 소개한 일도 있다.
구 황실에 대한 이 대통령의 태도는 영친왕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영친왕을 한국에 모셔와 군 관계 일을 맡기려고 유태하씨 편에 편지도 여러번 했다.
다만 오해가 생겼다면 영친왕이 쓰고 있던 관저를 주일 대표부 건물로 쓰려던 일이다.
이 대통령은 주일 대표부가 은좌의 「핫도리·빌딩」을 쓰고 있었으므로 일본 궁성이 내려다보이는 영친왕 관저를 대표부로 썼으면 했던 것이다. 그래서 52년께 유 참사관을 시켜 『체통을 지키실 만큼은 배려할 테니 관저를 대표부로 쓰도록 하고 귀국하시는게 어떠냐』는 교섭을 하도록 했다. 이 제의에 영친왕은 찬동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얼마 뒤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대통령은 『우선 집 값은 아니지만 30만 달러를 영친왕께 드리고 귀국하시도록 교섭하라』고 재차 지시했다. 그러나 반응이 좋지 않았다. 아마 전쟁 중에 뭣 하러 귀국하느냐고 주위에서 말리고 일본측에서도 방해 공작을 한 모양이다. 이렇게 해서 관저 양도 교섭은 깨졌다. 물론 이 대통령도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일제 때 이왕직 동경 산장소 재산으로는 이 관저와 별장 두곳, 임야 한군데가 있었다.
이왕직 재산이 구 황실 재산 사무총국으로 넘어온 만큼 이것을 국가 재산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윤우경씨는 56년에 일본에 가 재산 상태를 알아보겠다고 나섰으나 이 대통령이 제지했다.
『그만 둬. 지금 영친왕이 쓰고 계시니 그대로 맡겨두는게 좋아. 자칫하면 소문이 좋지 않게 나겠네. 』 결국 이 재산은 모두 영친왕의 개인 소유가 돼버렸다.
이 대통령이 대표부 건물로 그렇게도 탐내던 영친왕의 관저는 일본 참의원 의장 관사로 빌려 줬다가 일본인에게 넘어가 현재는 「아까사까·프린스·호텔」이 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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