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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광복에 바친 젊음-고 이범석 장군의 일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청산리 싸움의 용장 철기 이범석 장군이 파란 많은 일생을 마쳤다.
1900년 서울에서 태어나 올해 72세. 한반도를 둘러싼 외세침략의 풍운이 사납던 때 태어났던 이범석 장군은 1915년에 중국 상해로 망명했었다.
15살의 앳된 소년으로 망명길에 올랐던 그는 처음부터 죄어드는 침략자 일본을 몰아내고 광복을 찾는 길은 힘밖에 없다고 단정해 곧 중국 운남성의 무관학교에 들어가 1919년에 졸업했다.
용맹을 떨친 청산리 전투는 바로 이듬해인 1920년 12월이었다. 당시 일본은 트집을 잡아「시베리아」에 출병, 「블라디보스토크」의 한국인 마을인 신한촌을 불태우고 북간도지방의 우리 독립군을 없애기 위해 19사단과 20사단의 대병력을 북간도에 투입했었다. 그는 이시영이 창설한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있다가 일본군의 침공을 맞아 김좌진 등과 같이 갑산의 맞은편인 청산리에서 왜군을 크게 격파, 용맹을 떨쳤던 것.
그 뒤 이범석 장군은 강화된 일본군에 쫓겨 「시베리아」로 후퇴, 한때는 합동 민족군 연해주지구사령관으로 활약하기도 했고 33년에는 중국 낙양군관학교에서 약 2백 명의 한국인들로 구성된 한국인장교·대장으로 광복의 힘을 길렀었다.
41년9월에 지청천 대장군과 같이 광복군을 창설, 참모장으로 활약했으며 일본의 패망을 내다보고 한국군으로서 일본에 선전포고하기도 했었다.
45년에 해방을 맞았을 때는 그는 광복군 중장으로서 일본군의 무장을 평화리에 해제, 접수하기 위해 즉시 귀국했었다.
이범석 장군은 해방직후의 혼란한 틈에서 좌익과 대결하기 위해 46년에 이른바 「족청」 으로 알려진 조선민족청년단을 창설, 단장으로서 진두에 나서 공산당을 제압했고, 48년에 우리나라정부가 처음 탄생했을 때는 초대 국무총리를 지내고 국방장관도 역임한 것을 비롯, 주중대사(51년), 내무장관(52년) 등 요직을 맡았고 52·56년에는 부통령에 출마했다가 낙선하기도 했다.
평소 승마와 사냥을 즐긴 그는 정치를 떠나 사냥 등으로 소일했으며 최근에는 회고록 『우등불』을 내놓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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