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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1)제26화 경무대 사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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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휴전 반대>
전장이 한참 진행되던 부산 피란 시절에는 고위 인사 자제들 가운데 병역 기피자가 상당히 있었다. 이 얘기가 대통령 귀에까지 들어갔다.
이 대통령은 어느 날 임시 관저에서 열린 국무회의 도중에 정색을 하고 이 얘기를 캐물었다. 『이봐, 국무위원 자제들 가운데 군대에 가지 않고 외국으로 도피한 사람이 있다는 얘기가 있던데….』
『제가 완전히 조사는 못해 봤지만 장·차관 자제 중에는 그런 일이 없을 겁니다.』 총리가 재빨리 이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 어물어물 대답했다.
『그래, 그렇지. 이런 일이 있어선 안돼.』 대통령이 더 이상 추궁을 안해 이 문제는 그대로 넘어갔지만 사실은 국무위원 뿐 아니라 국무총리를 지낸 분 자제 가운데도 미국이나 일본으로 피해 병역을 기피한 사람이 있었다. 임철호 비서가 조사한 바로는 국무총리·국무위원·처장 아들 중에도 도피자가 있으나 대통령께는 보고되지 않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51년 여름으로 기억된다. 당시 계엄 사령부 민사 부장이던 김중원 대령이 공산당 잡는 기관이 경찰·헌병 특무대 등 7개라고 보고해 왔다. 이 대통령은 『잡는 기관이 아무리 전쟁 중이라도 그렇게 많으면 백성들이 맘놓고 살수가 없어. 당장 줄이게』하고 지시했다.
그래서 대공 수사 기관 2개가 얼마 안 있어 없어졌다.
전쟁 기간 중 대통령이 가장 꺼리던 일은 사형수 확인 결재였다. 전쟁 중이라 군법회의에서 사형수가 많았다. 이 일은 임철호 비서의 소관 사항인데 확인 결재 내용을 대통령은 꼬치꼬치 따지곤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사인」만 하면 끝나는 거지. 그냥 집행되는 것이지.』
『그렇습니다. 각하 결재로 끝나는 겁니다.』
『이걸 내가 더 자세히 알아야 하는데….』
이 박사는 「사인」을 망실이다가 『두고 보자』고 보류하는 일이 많았다.
법무부와 국방부에서는 결과를 채근해 오는데 대통령이 결재를 안 하니 곤란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임 비서도 사건 내용을 모두 다시 조사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조사를 하다 보니 피의자 가족의 구명 운동이 심해지고 잡음이 나 안되겠더라는 것이다.
사형 확인은 자꾸 밀렸다. 고심하던 임 비서는 대통령께 『원래 사형확인은 대통령 권한이지만 소관 장관에게 위임하는게 좋겠습니다』고 건의했다. 대통령은 처음 이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사면권은 대통령에게 있다』는 점을 설명하면서 다시 권하자 승낙이 내려졌다.
53년 초에 행한 가장 큰 국내 조치는 2월15일에 단행된 제1차 화폐 개혁이다. 전쟁 중 「인플레」로 떨어진 화폐 단위 가치를 높이기 위해 1백원을 1원으로 절하한 것이다. 이 대통령은 화폐개혁을 계획하면서 모든 돈을 일률적으로 1백대1로 교환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재무부 측은 화폐 단위만 바꿀 것이 아니라 강제로 통화를 흡수해 통화량을 대폭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무부의 안이 채택됐으나 국회의 반대와 경제 사정으로 금융 조치 수정을 가하게 돼 통화 개혁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후에 책임 문제가 거론될 때 고재봉 임철호 비서가 국회의원들과 부동이 돼 행정부 방침을 공격했다는 모략이 들어와 두 사람이 경무대를 물러나는 파동이 있었다.
한편 「아이젠하워」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하고 3월5일 「스탈린」이 죽은 뒤 휴전 「무드」는 급진전했다. 이 대통령은 통일 없는 휴전, 중공군이 물러가지 않는 휴전을 극구 반대했으나 우리 의사와는 관계없이 휴전이 진척됐다.
이해 2월22일 「클라크」 「유엔」 군사령관은 김일성과 팽덕한에게 중환·중상 포로 송환을 제의했다. 공산측은 3월28일 이 제의를 수락하고 52년10월8일 이래 무기 휴회에 들어간 휴전회담을 다시 열자고 제의했다.
4월20일부터 1주일간 「유엔」측은 5천8백명을, 공산측은 6백84명의 상병 포로를 각기 송환했다. 이 송환이 끝나자 휴전 회담이 재개 됐다.
전국적으로 통일 없는 휴전을 반대하는 국민대회와 「데모」가 벌어졌다.
이 대통령도 담화를 내 휴전 반대 「데모」를 부채질했다.
『우리 우방들이 중공군을 한국 땅에 있게 하고 평화나 휴전을 협정한다면 우리는 군인이나 평민은 물론하고 죽기를 결심하고 우리끼리 좌우간 귀정을 내겠다는 결심이다. 전 민족이 궐기해서 통일 없는 평화를 받을 수 없다는 주장을 시위 운동으로 표명하려는 것을 정부가 막을 수 없는 형편이다.
앞으로 국제 정세를 따라 어디까지 갈는지를 우리는 예측할 수 없으나 외국인을 배척하거나 우방에 대한 악의를 나타내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될 것이다.』
그러나 휴전 협상이 진척되자 이 대통령은 한국측 휴전 회담 대표인 최덕신 장군을 소환하고, 「유엔」군과 공산군이 일시에 철수하되 사전에 한·미 상호 방위조약을 체결해 공산 측이 침략하지 못하도록 보장할 것을 요구했다. <계속> [제자는 윤석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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