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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제자 윤석오>|<제26화>경무대 사계(58)|황규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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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두 갈래 발 당>
이 박사가 신당 필요성을 역설하기 전에 국회에서는 공화 민정 회가 중심이 되어 신당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꾸준히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박사의 담화가 나오자 신당운동은 민우회의 일부 의원의 호응을 얻어 더욱 활기를 띠게 됐다.
그런데 신당운동은 두 갈래로 추진됐다. 원내의 이런 움직임과 때를 같이하여 원외에서도 국민회의 이활, 노총의 주종필, 농 총의 채규항 씨 등이 중심이 되어 기타 청년단 출신 및 사회단체까지 포섭하여 신당발기준비협의회를 만들었다.
통일적이고 강력한 신당운동을 벌이기 위해서는 이같이 이원화된 조직을 하나로 통합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원내의 합동준비위원회가 구성되고 가칭 통일노동당이란 간판이래 각 도-군-시단위로 발기인대회가 열리고 당명과 정책결정을 위한 회합이 계속됐다.
그러나 원내외간에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고 원내에서조차 구 신정동지 회 파와 구 공화 구락부간에 의견이 엇갈렸다.
그러던 중 11월30일 정부로부터 대통령직선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이 제출되자 이를 계기로 현행제도를 고수하려는 보수적인 원내 파가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서자 신당운동은 완전 결렬됐다.
원 내의가 똑같은 자유당이란간만을 내걸고 독자적인 발 당 대회를 가졌다. 한쪽은 원내자유당으로 불리는 내각책임제 개헌의 지지세력이었고, 다른 쪽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적극 밀고 나간 원외 자유당이었다.
여기서 원내자유당은 또다시 두 파로 갈라졌다. 원외자유당과의 제휴를 주장하는 구 신정동지 회 세력인 이른바 합동 파와 내각책임제 개헌을 주장하는 구 공화 구락부 의원 파로 분열되어 각자 독자적인 행동을 벌였다.
신당운동에 따라 원내의석에도 이합집산이 있었다. 원 내외자유당이 아직 교섭단계등록을 하기전인 국회 회 말의 원내세력 분포는 1백8명의 공 화 민정회 의원 중 23명이 이탈하여 12명은 민우회에 가입하고 11명은 무소속으로 남아 공 화 민정회는 85명으로 줄어들었다.
반면에 민우회와 무소속은 22명과 6명에서 35명과 16명으로 늘어났고 민국당 만이 계속 39명으로 변동이 없었다.
당시 원외자유당은 국민 회·부인회·노총·청년단출신을 조직의 발판으로 삼고 대통령직선제 개헌으로 이대통령을 재선시키고 이범석씨를 부통령으로 앉혀 실권을 잡으려는 속셈이었다. 원내 자유당은 민국당 무소속과 손을 잡아 내각책임제개헌으로 이 박사를 상징적인 국가원수에 굳히게 하고 국무총리에 장면박사를 옹립하여 정권을 쥐겠다는 속셈이어서 양자는 동상이몽의 동명이질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박사는 당초에는『국민들에게 정 당하는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해』새로 정당을 만들기로 했었으나 사정이 변하여 생각도 달라졌다.
한창 전쟁 중인데다 설상가상 격으로 국민방위군사건과 거창 사건이 터져 국민감정이 뒤숭숭한 판에 원내자유당과 야당의원들이 단결하여 내각책임제로 개헌을 해서 이 박사를 거세하려고 했으니 이박사가 방관하고 있을 리 만무했다.
이 박사는 우선 자기 지지세력을 총동원해서 야당의원들의 개헌공작을 분쇄하는데 총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될 난처한 입장이 됐다. 또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대통령의 자리를 지켜야지 전시 중에 물러나게 되면 큰 혼란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직선제 개헌안을 관철시킬 것이라 마음먹었다.
그래서 이 활 씨 등이 중심이 되어 이박사의 지지세력인 원외 자유당을 주도, 원내세력과 강력히 맞섰다.
원외 자유당은 비밀당원을 만드는 등 착실한 작업을 벌였는데 자금이 없어 곤란을 받았다.
자금마련에 고심하던 중 하루는 이 박사와 아주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 실업인 김의정 씨를 찾아가『대통령이 정당을 만들려고 하니 돈이 필요하다』면서 당시 돈으로 1억8천만 원을 기부하라고 했다.
실업인 김씨는 그때 고려흥업 이란 회사를 갖고 있었는데 중석으로 돈을 많이 번 사람이다.
실업인 김씨에게 정치자금을 요구한 것은 이 박사와 아무런 상의도 없었고 대통령과 가까웠던 분이 자기생각대로 한 것이었다.
하루는 김의정 씨가 찾아와『대통령이 나한데 1억8천 만원을 요구한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런 일은 없다』고 했지만 김씨는『2억 원을 내겠다』고 하고 돌아갔다. 김씨가 온 것은 사실 확인보다는 헌금할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자금문제가 해결되자 그해 12월23일 원외 자유당은 총재에 이승만, 부총재에 이범석씨를 각각 추대했다. 또한 원내자유당은 의장은 궐 석으로 비워둔 채 부의장에 이갑성·김동성 씨를 뽑았다.
이 박사는 원외자유당총재로 추대됐으나 실제로 그 자리에 취임하지는 않았다. 당직자들에게 임명장을 줄 때 총재 이승만이란 도장이 찍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박사는 이것을 알고『내가 언제 당수 한다고 했느냐』고 하면서『내 도장 찾아와』라고 호통을 쳐서 도장을 되찾아 왔다.
이 박사는 당수문제에 대해『당수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 당에 유공한 사람이 상향식으로 올라가 되는 게야』라고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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