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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건국호의 출격(2)|하늘의 전쟁(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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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미 극동공군사령부는 적 남침 이틀만인 6월26일 저녁에야 한국공군이 목마르게 기다리던 F-51「머스탱」전투기의 제공을 승인했다. 이래서 AT-6기 건국 호를 타고 출격하던 10명의 A급 조종사들은 이날 저녁에 부랴부랴 수원에서 미 수송기 편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원래 한국공군은 20여명의 전투조종사밖에 없었는데 그중 10명은 건국 호를, 그리고 나머지 10여명은 L-4와 L-5기를 각각 나눠 타고 있었다.
6·25첫날과 그 이튿날에는 건국 호나 L형기가 모두 시제폭탄 투하와 적 정찰에 출격했는데 10명의「톱·클라스」조종사들이 F-51 인수 차 일본에 가자 나머지 조종사들은 더 외롭게 악전고투를 하게 되었다. L형 조종사들은 단 한번의 훈련비행도 하지 못한 채 선배조종사가 타던 건국 호를 그대로 몰고 적지에 출격하였다.

<조종사 없어 두 번씩 출격>
다음은 7월2일에 10대의 F-51「머스탱」이 일본「이다쓰게」로부터 한국에 도착하기까지 5일 동안의 가장 길고도 외로웠던 L형 조종사들 전기.
▲신유협 씨(당시조종사=중위·예비역 공군준장·현 사업·48)<6월25일에 나는 L-5기를 타고 동두천에 정찰을 나갔고 27일에는 미아리 고개에 출격해서 폭탄을 투하한 후 그날저녁에 수원으로 내러갔습니다. 여의도서 수원으로 이동하는데 10명이 F기 전투기를 받으러 일본으로 가서 조공사가 모자라 박재호 소위 등은 밤중에 두 번씩 왕복비행을 했어요.
수원비행장에 이동 한 후에도 정찰비행을 계속 했지요. 오춘목 소위는 의정부방면에 출격했다가「야크」기와 공중전을 벌이기도 했어요. 기체가 작은 우리 L-4기는 선회궤도가 「야크」보다 좁아서 빨리 돌며 기 총 소사를 해대니까 적기는 지쳐서 사라집디다. 나는 우리조종사들이 수집한 정보를 김정렬 참모총장 한데 일괄보고 하면, 김 총장은 그것을 이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찰한 보고를 잘 들 믿지 않아 나는 정찰비행은 반드시 3백「피트」이하의 저공에서 하도록 했어요. 6월30일에 이경복 상사는 L-4기로 한강변을 저공 정찰하다가 적탄에 맞아 추락, 전사했어요.
이날 조명석 중위도 정찰비행 중 피격, 대전기지에 돌아왔으나 절명했고요.
이 두 조종사의 전사는 내가 저공정찰을 시켜서 그렇게 된 것 갈아 지금도 가슴이 아픕니다. 7월1일에 소사에 내습한 적「야크」기를 미 공군이 격추시켜 낙하산으로 내려 온 괴뢰조종사를 육본후퇴부대에서 생포했어요.
그 괴뢰조종사는 자기는 절대 공산당이 아니며 나를 잘 안다면서 만나게 해달라고 애원 하더래요.
결국 만나지는 못했고, 그자는 나중에 죽었다는 이야기만 들었어요. 이 무렵에 육군 참모 차장 이종국 대령이 와서 서울에 「비라」를 뿌려달라고 합디다. 이강화 중위가 건국 호를 몰고 갔는데 적기와 만나 싸우다가 피 탄, 수원에 간신히 들어왔어요.

<적탄 맞고 겨우 귀대일쑤>
착륙하자마자 건국 호는 불타버리고 동승한 이 대령은 겨우 빠져 나왔어요. 6월29일「맥아더」원수가 수원에 귀대해서 이 대통령과 만날 때 나는 그 옆에 있었습니다.「맥아더」원수는 이 대통령에게 잠깐 일본에 함께 가자고 했어요.
원수는 호의적으로 그런 권고를 했을 거예요. 그러나 대통령은 얼굴이 뻘개지면서 나를 보고 여기 미군들 총을 다 회수하라고 소리치면서 우리끼리 싸우자고 합디다. 통역도 차마 대통령의 그런 말은 제대로 옮기지 않더군요. 사실상 이때 정보입수는 거의 우리정찰비행대에 의존했어요.
박범집 총 참모차장은 무모할 이만큼 정찰비행을 독전했어요. 3백「피트」이하에서 저공정찰을 안 하면 조종사를 군법회의에 넘긴다고 했으니까요.>
▲권성근씨(당시 조종사=중위·예비역 공군소장·현 사업·47) <26일 저녁에 선배조종사 10명이 F-51전투기를 인수하러 일본으로 떠나자 나머지 조종사들은 아주 허전하고 불안한 생각이 듭디다.
우리만 한국에 남아 죽는 게 아니냐는 생각마저 들데요. 27일 아침부터는 선배들이 타던 건국 호를 우리가 대신 타고 출격하여 적「탱크」에 폭탄을 투하했습니다. 25일에 수원에 분산시켰던 일부 건국 호를 다시 여의도에 가져다가 일본에 간 조종사들의 다음 급조종사들이 서열 순으로 몰고 나갔지요.
아직 건국 호에 익숙지 못한 조종사들은 정비사를 함께 태워 기내에서 협조를 받으며 출격했어요. 26일 저녁으로 시제폭탄은 등이나 27일부터는 기관총만 달고 나가 쏴 댔어요. 27일 아침에 김정렬 참모총장이 조종사들을 집합시키더니 돈 19만원씩을 나누어주면서 오늘저녁부터는 수원비행장에 가서 싸우자고 비장한 표정을 지 습디다.
우리들은 탄 돈을 노끈으로 묶어 기내에 달아매고 저녁에 비를 맞으며 수원비행장으로 이동했어요. 이날 밤 대부분의 조종사들은 수원시에서 탄 돈을 거의 다 쓰고 돌아왔어요. 28일에는 다시 대전기지로 옮겨 정찰비행을 계속 했습니다.>
▲옥만호씨(당시 조종사=소위·현 공군참모총장 대장·47) <6·25가 터지자 비행기를 볼 줄 아는 조종사들은 l-4·L-5·AT6 등 닥치는 대로 몰고 출격했습니다. 적 공군에 비해 아군의 비행기수효나 성능은 형편없었지만 우리공군장병의 사기는 아주 높았고 비겁한 자는 한사람도 없었어요. 출격했던 비행기가 돌아오면 남아 대기하던 조종사들이 서로먼저 나가겠다고 나섰고 사병들도 뒷자리에 앉아 폭탄과 소총으로 적을 막겠다고 했으니까요. 6·25초에 비행기다운 비행기를 한번 타보지도 못하고 산화한 여러 공군장병들, 특히 사병들의 그 불타던 애국심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겠어요.

<눈 아래 탱크에 소총 갈겨>
나 자신은 6월25일부터 l-5와 l-4기 등을 번갈아 타며 문산 쪽에 출격했어요. 한사람은 비행기를 몰고 다른 한사람이 뒤에 30「파운드」무게의 국산폭탄 두개와 소총을 들고 무턱대고 적진으로 날아가는 것이었어요. 뒤에 탄 사람이 몸을 비스듬히 내놓고 내려다보다가 적의 행군을 발견하면 소총으로 마구 갈겨대고,「탱크」같은 게 보이면 목 쪽으로 폭탄을 떨어뜨렸어요.
이런 식으로 적의 육중한「탱크」를 공격한다는 게 우스운 이야기고 또한 적 소총만 맞아도 떨어질 비행기였지만, 그때야 뭐 죽고 사는 게 염두에 없었으니까요. 그저 적「탱크」한대라도 더 부수겠다는 생각뿐이었지요.>
▲주영복 씨(당시 조종사=소위·현 공군참모차장 중장·45) <아시다시피 6·25직전에 우리공군은 비무장 연습기만 20여대 갖고 있어 조종사가 비행기를 얻어 타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때 우리공군 주력이라고 볼 수 있는 at-6기, 즉 건국 호를 사들여 올 때는 정말 굉장했습니다. 최신식 비행기가 들어왔다고 해서 여의도 비행부대내의 경비가 아주 삼엄했어요. 경비병이 기관총을 들고, 호에 타는 조종사 이외는 얼씬도 못하게 했으니까요. 나는 6월25일에 비상소집을 받고 달려왔더니, 비행단장이 임진강에서 문산 쪽으로 내려오는 적정을 정찰하라고 명령합디다.< p>

<무전기도 없는 l-4기>
나는 L-4기에 사병 한 명을 뒤에 태우고 문산 방면으로 비행하는데 적「탱크」부대가 벌써 임진강을 건너 남하하는 게 보이데요. 그런데도 문산 어느 국민학교에 주둔하고 있는 아군부대는 적 공격을 눈앞에 두고도 별 경계태세를 취하지 않고 있어요. 물론 적정을 모르니까 그런 거지요. 큰일났다고 생각하고 우군지상부대에 연락하려고 해도 방법이 없어요. 지상과 통화할 수 있는 무전시설 같은 건 없었으니까요.
급한 김에 날개를 흔들고 지나가도 지상에서는 우군 기가 왔다고 손만 흔들 뿐이지 알아차리지를 못해요. 애가 타서 학교 위를 몇 바퀴 돌고 있는데 뒤에 탔던 사병이 자기 구두를 벗어 아래로 떨어뜨립디다. 밑에서 어느 병사가 그 구두를 줍더니 막사 안으로 달려가고 곧이어 서둘러 전투준비를 하는 게 보이더군요. 『이잰 됐다』고 여의도에 돌아와 같이 탄 그 사병이야기를 들으니 참 재치가 있었어요. 빈 담뱃갑에다 열쇠 끝으로「적 임진강 도하」라고 짓이겨 써서 구두 속에 넣어 떨어뜨렸다는 겁니다. 원래 조종사에게 연필이나 수첩은 필수 휴대품이지만 그날은 허겁지겁 출격하느라고 못 가지고 왔던 거지요.

<적탄 맞고 애 기 날개 뚫려>
26일에는 뒤에 윤석준 소위를 태우고 창 동 고개까지 나갔어요. 윤 소위는 폭탄을 2개 안고 갔는데 고개를 내려서니 적「탱크」가 바로 아래에 보이고 고사기관총탄이 마구 올라옵디다. 어떤 총알은 비행기날개를 뚫고 들어와 발 밑에서 구르기도 해요.
내가 고도를 더 낮출 때, 윤 소위가 폭탄을 투하하고 기지에 돌아왔는데 기체 곳곳에 탄흔이 있어요. 너무 저공으로 난 것 같았어요. L-4기는 쇠로 된「엔진」과 뼈대는 헝겊으로 싼 것이기 때문에 소총으로도 격추할 수 있는 거예요. 돌아오니 박범집 참모차장이 적「탱크」에 명중시켰느냐고 물어서『못 맞추었다』고 했더니『이놈들아, 도로 가라』면서 호된 기합을 줍디다. 좀 있다가 또 출격했습니다.>

<주요일지>(1951년 9월17·18·19일)
※9월17일▲「리지웨이」사령관, 한국전선 시찰▲「리지웨이」, 휴전회담 판문점에서 재개 제의▲「이란」의「모사데그」수상 암살음모 적발▲「나토」이사회 속개
※9월18일▲「유엔」군,「단장의 능선」상의 주요고지 탈환▲공산 측,「유엔」군이 중립지대 침입했다고 비난▲주은래, 대일 강화조약 비난 성명▲「아데나워」수상, 서독재무장의 필요성 역설▲영국 왕 중태 설
※9월19일▲적, 동부전선서 반격▲아군,「단장의 능선」고지도 포기▲1백12대의 피아「제트」기 공중전, 적기 5대에 손해▲공산 측, 판문점에서 회담재개에 동의▲전북내의 공비소탕 순조롭다고 윤 경찰국장 담화▲미 정부, 불의「인도차이나」작전 원조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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