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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건필 38년」…환갑 지난 대 기자|NYT지 외교 평론가 사이러스·설즈버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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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평생을 언론에 바친 노 기자는 엄격한 뜻에서 역사의 산 증인이다.60이 넘도록 취재일선에서 활동하고있는 노 기자는 전세계적으로도 그리 흔하지는 않다. 신문의 날을 맞아 외국의 유명 노 기자들의 일생을 소개한다. <편집자주>【워싱턴=김영희 특파원】
전통적으로 기자 기핏증에 걸린 일본의 천황을 단독 회견하는데 미국대사가 배석하고, 일본외무성의 대사급 관리가 통역을 담당했다고 하면 이런 행운을 잡은 사람은 그의 기자생애의 정상에 올랐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는 초강대국 출신으로 국제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초 일류지의 기자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 정도의 암시를 주면 대뜸 「뉴요크·타임스」의 이름이 등장하고 사 반세기 이상 이 신문을 탁월한 기사와 논평으로 장식해온 「사이러스·설즈버거」가 「클로스업」된다.
「제임즈·레스턴」을 제쳐놓고 하필 「설즈버거」의 이름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레스턴」은 어느 편이냐 하면 미국의 국내문제에 보다 치중하는 반면, 외교평론가인 「설즈버거」는 직함 그대로 「뉴요크·타임스」의 첫손꼽는 외교문제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레스턴」은 「워싱턴」에 사무실을 가지고 있지만 「설즈버거」는 벌써25년째 「파리」에 사무실을 두고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제는 환갑을 훨씬 넘어선 나이지만 「설즈버거」는 지금도 그의 상표처럼 되어버린 해어진 『전천후 「트렌치·코트」』를 걸친 심각한 모습을 세계 도처에 불쑥 불쑥 내밀 수 있다.
「닉슨」을 포함한 미국의 역대대통령은 물론 「스탈린」「드골」「네루」「처칠」같은 역사적 인물들, 각국의 국왕·수상·대통령, 독재자 등 「설즈버거」의 회견요청을 거절한 사람은 없다. 「파리」에 있는 「설즈버거」사무실은 그가 만난 각국지도자들의 사진이 4면의 벽을 채우고있다. 「설즈버거」의 기자수첩에는 아직도 회견상대와의 신사협정 때문에 공개하지 않은 역사의 비화들이 담겨져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드골」이 죽은 뒤 「설즈버거」는 그때까지 공개되지 않았던 「드골」과의 대화를 발표하여 다시 한번 대 국제 기자로서의 관록을 과시한바있다.
「뉴요크·타임스」가 훌륭해서 빼어난 기자들을 배출하느냐, 기자들이 탁월해서 「뉴요크·타임스」같은 초일류신문을 만드느냐는 논쟁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처럼 결론이 없다.
특히 『「설즈버거」의 오늘』의 배경을 설명할 때는 「뉴요크·타임스」라는 발판 말고도 「설즈버거」라는 그의 「라스트·네임」이(성)이 추가된다.


그것은 「사이러스·설즈버거」가 「뉴요크·타임스」제2대 사장 「아더·헤이스·설즈버거」의 조카이고, 현 사장 「아더·오크스·설즈버거」의 4촌이라는 혈연관계 때문이다.
「뉴요크·타임스」의 족벌지배는 원체 철저하다. 1896년 유대인 「아돌프·오크스」에 의해 창설된 이 신문은 「오크스」의 사위 「아더·헤이스·설즈버거」가계승하고 「설즈버거」의사위인 「오빌·드라이푸스」를 거쳐 「아더·헤이스·설즈버거」의 아들인 「아더·오크스·설즈버거」로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이러스·설즈버거」는 「설즈버거」가 사람으로서는 이성적인 방법으로 언론계에 투신했다. 「실즈버그」가 사람들은 남자는 「컬럼비아」대학을, 여자는 이대학과 자매관계에 있는 「바너드」여자대학을 다니는 게 통례였다.
그러나 「사이러스·설즈버거」는 「컬럼비아」대신 「하버드」를 택했다. 34년 「하버드」를 졸업한 뒤 그는 곧장 「뉴요크·타임스」로 가지 않고 5년 동안 「피츠버그·프레스」·UP통신·「런던·이브닝·스탠더드」의 「유럽」특파원을 차례로 지냈다.
39년 「발칸」반도 지국 장으로 「뉴요크·타임스」에 입사할 때 그는 이미 중견기자로서 어느 정도의 명성을 날리고 있을 때였다.

<2차 전 해외취재 총지휘>
「뉴요크·타임스」사의 복도를 뛰놀면서 자란 현 사장과는 전혀 다른 배경을 갖고 「뉴요크·타임스」에 들어간 것이다. 「사이러스·설즈버거」는 「뉴요크·타임스」입사 후 첫 3년 동안에 「발칸」「아프리카」「이탈리아」소련 중동의 전선을 무려 10만 「마일」이나 여행했다.
그의 종군 기사는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파시즘」에 철퇴를 가하는 것들이었다.
41년 「슬로바키아」에서 「스파이」혐의로 「히틀러」의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유대인인 그의 신변은 최악의 위기에 처해지기도 했다. 「무솔리니」측근에서는 「설즈버거」를 『이 나라 저 나라에 독을 뿌리고 다니는 독거미(크리핑·터렌틀러)』라고 증오했다.
2차 대전을 취재하면서 「설즈버거」는 자신의 무대는 전선이라고 단정했다. 44년 그는 「뉴요크·타임스」의 「수석해외특파원」으로 임명되었다.
모든 해외취재원이 그의 일 선지휘하에 들어간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해외취재의 야전군총사령관이 되었다. 이때부터 51년 기자로서의 최고의 영예인 「퓰리처」상을 받을 때까지가 일선기자 「설즈버거」의 가장 화려하고 박력 있는 시기였다. 「설즈버거」는 국제정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기사와 논평으로만 유명한 게 아니다. 그는 포도주와 여자에 대한 안목이 높고 야심가로서도 이름 높다.

<술·여자에도 높은 식견>
「설즈버거」는 「발칸」이나 북 「아프리카」전선을 누비다가도 자주 「파리」본부로 돌아와 「유럽」의 문화적인 향기 속에서 포도주를 즐기고 미녀들과 어울렸다. 그의 여자를 보는 눈은 그의 비서의 미모가 증명한다. 「그리스」취재 중에 그는 그 나라 왕실과 가까운 매혹적인 미인을 만났다.
취재전선이 「터키」로 옮기자 그는 단파무선으로 「아테네」의 처녀와 밀어를 속삭이는 정열가였다.
「설즈버거」의 불타는 야심은 그가 평소 각국지도자들과 만나기를 특히 좋아하고 그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기사를 통해 국제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애쓴 데서도 나타난다.
결국 그의 이와 같은 야심은 「뉴요크·타임스」사내에서의 권력투쟁으로 확대되는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47년, 인생30대의 중반에 접어든 「설즈버거」는 편집국장 「에드윈·제임즈」의 아들 「미첼」을 자기휘하의 해외 특파원으로 추천했다.
그러나 「제임즈」의 뒤를 이어 편집국장이 되기로 되어있는 「터더·캐틀리지」가 반대했다. 편집국장아들인 「미첼」을 해외특파원으로 채용하면 「설즈버거」가 「미첼」을 인질로 삼아서 본사편집국의 신문제작에 부당한 간섭을 할 염려가 있고, 그렇게되면 자기가 편집국장이 되어도 실용이 제한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당시의 사장 「아더·헤이스·설즈버거」의 조카인 「사이러스·설즈버거」의 승리로 끝났다.
54년 「설즈버거」는 10년 동안 지켜온 「수석해외특파원」자리를 내놓고 외교평론을 전담케 되었는데 예정대로 「제임즈」의 후임으로 편집국장이 된 「터너·캐틀리지」가 재빨리 「수석해외특파원」제도를 폐지해 버린 것도 결국은 47년이래 해외특파원 지휘권을 둘러싸고 「설즈버거」와 벌여온 권력투쟁의 여운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대 해빙』등 저서9권>
54년 당시의 극동특파원 「그래그·맥그레고」가 48년 이래의 외신부장인 「이마뉴얼·므릭드먼」의 이름을 모르고 있다가 친구인 「시카고·데일리·뉴스」의 「카이스·비치」의 얘기를 듣고 비로서 알았다는 또 하나의 일화로 「설즈버거」가 10년 동안 「뉴요크·타임스」의 「해외왕국」을 따로 세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설명해준다.
「사이러스·설즈버거」도 처음에는 이단적인 길을 걸었지만 역시 「설즈버거」가 사람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지금도 「파리」를 거점으로 건필을 놓지 않고 있는 「설즈버거」라는 대 기자는 그의 야심의 결정으로『대 해빙』『미국외교는 어디가 잘못되었는가』『「드골」과 「알제리」』『촛불의 행렬』『최후의거인돌』『미완성혁명』등 9권의 저서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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