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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하늘의 전쟁(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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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951년10윌11일부터 강릉의 전진기지에서 「독자작전」을 개시한 한국공군 제1전투비행단 제10전대는 연일 북한상공에 출격하여 주로 적 보급로를 강타하였다. 대장 김영환 대령의 본을 떠 모두 흰 것을 빨간 「머플러」도 바꾸어 목에 두른 F-51 「무스탕」전투조종사들 사기는 하늘을 찌르듯이 높았다. 미 공군의 도움 없이 마음껏 적지를 누비는 이들 한국조종사의 출격기록은 다음 통계에서 보는바와 같이 미군조종사들보다도 훨씬 더 좋았다.

<북괴공군남침준비 미리 탐지>
즉 공격에 있어 동수 투하에 대한 명중률은 미 공군의 23대1내지 8대1에 비하여 평균4내지 8대1이었고, 독자작전수행 월여가 되는 11월 하순에 이르러서는 거의 2대1이상의 좋은 기록을 냈다. 무장사고 역시 훨씬 적어서 경비사고는1∼2건밖에 없었으며, 이사고도 2백 시간이상 사용한 노후 「엔진」때문에 부득이한 것이었다. 강릉의 제10전대원들은 이런 기록을 내면서 창군서부터 L-4·L-5기두 AT6기를 가지고 적 남침 초에 고전하던 일을 새삼 되새기는 것이었다. 그럼 다시 관계자들로부터 공군의 독립·공군력강화의 고충·북괴공군의 실태 등 6·25직전까지의 이야기를 들어보겠다.
▲김정렬씨(당시공군창설자·초대공군참모총장·전 국방장관·예비역공군중장·현 삼성물산사장·55)<나는 아무래도 빨리 공군을 독립 강화시켜야겠다는 생각에서「항공의 탕종」이라는 책자를 써서 각계 요로에 들리고 적극적인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대통령을 비롯해서 총리·국방장관·국회 의원 등을 새벽같이 찾아다니면서 간청도 하고 설득도 했어요.
이승만 대통령만은 공군에 대한 이해가 매우 깊어서 미국에 전투기 제공교섭을 하다가 안되니까 우리 돈으로라도 사자고 애국헌금모집운동을 벌이게 했어요.
미국의 1950년도 대한 군 안 액은 1천30만「달러」인데 그중 항공관계로 쓸 수 있는 것은 9만8천 「달러」에 불과했어요. 49년9월에 우리국민의 헌금30만 「달러」로 「캐나다」에서 한대에 2만7천 「달러」씩 주고 AT6기 10대를 사기로 계약을 하고 나머지3만 「달러」로는 기관총·휘발유·실탄 등을 사도록 했어요. AT6기 10대는 6·25가 발발하기 40일전인 5월15일에 들어 왔읍니다. 49년10월1일 「공군 본부 직제」에 관한 대통령에 의해 1천1백 명의 병력과 L-4기10대, L-5기10대의 경비행기를 가지고 육군항공대는 공군으로 독립했습니다.
본부를 국방부별관에 두고, 초대 참모총장에는 내가 취임했고, 여자항공교육대도 항공대로 개편해서 대장에는 이정흄 대위 ,학생대장은 군광모 양과 김경오 양이 맡았지요. 공군은 육군의. 반대를 무릎 쓰고 이대통령의 특별배려와 해군의 손원일 제독 등의 협력을 얻어 겨우 독립한 겁니다.
50년 초부터 입수된 정보에 의하면 북괴공군도 확실히 전쟁준비를 하는 것이었어요. 9백 여명의 항공 인을「모스크바」로 보내 항공학교에서 맹훈련을 시켰어요.
당시 북괴는 숙련·미 숙련을 합해서 4백 여명의 전투조종사와 2백 여대의 비행기를 가지고 있었어요. 이 정보를 모두 미군에 알려주었지만 별 반응이 없습디다. 우리공군은 앞서 말한 「캐나다」에서 사온 건국 호(AT-6)10대와 L형14대를 가지고 6·25를 당한 겁니다.>
▲장성환 씨(당시 여의도비행대 제2중대장=중령·예비역공군중장·전 교통부장관·52) <49년 후반부터 북괴가 공군을 대폭 증강하고있다는 정보가 속속 입수되더군요. 우리공군서 L-5기로 야간정찰도 해보았고, 50년4월에는 북괴공군의 이건순 중위가 IL-10전투기를 몰고 전해비행장에 착륙, 귀순함으로써 더욱 자세한 정보를 얻게됐지요.
우리는 이 같은 정보를 KMAG(주한미군고문단)단장「윌리엄·로버트」준장에게 제공설명 했지만 믿지를 않더군요. 이건부 중위가 귀순할 때 나는 김정렬 총장과 함께 김해로 내려가 이야기를 듣고 김 총장은 직접 IL-10기를 조종해 김포로 오다가 연료가 떨어져 천안서 불시착했어요.

<미,"전투기 원조계획 없다">
나는 가지고 간 L-5에 이 중위를 태워 가지고 여의도로 올라왔습니다. 천안에 불시착한 IL-10기를 해체해서 서울로 수송해놓고 이승만대통령이 직접 KMAG요원들에게 보여주면서 북괴공군력에 대한 설명을 했어요.
미군고문들도 이때서야 당황한 빛을 보이면서 우리가 그 동안 제공한 정보를 믿는 것 같더군요. 이때부터 이승만대통령과 우리공군은 각 요로를 통해 미 극동군사령부에 전투기를 달라고 했지만, 번번이 거절을 당했어요.
미 극동공군서는 국무성서 한국에 대한 전투기 원조계획이 없어 못 준다면서 한국안전을 위한 공군력은 미 공군이 책임을 진다는 거예요. 김정렬 총장은 AT6기(건국호)를 사용해 조종사훈련과 양성에 전념하면서 전투기도입을 학수고대하다가 6·25가 난거지요.>
다음은 6·25전의 북괴공군의 동태.
▲이건순씨(당시귀순조종사=중위·현○○기지사령관 보좌관=대령·48)<나는 평양서 국민학교 선생을 하다가 면당세 포위원장의 꾐에 빠져 괴뢰군에 입대했어요. 46년10월에 정치강습을 받으러가라는 세포위원장의 말을 듣고 간 곳이 바로 북괴항공군관학교란 곳이었어요.
평양 둔 전서 신검을 받고 간단한 학과시험에 합격했는데 기차를 태우더니 군가를 가르치며 젊은이면 누구나 동경하는 데로 간다면서 데리고 갑디다.
이렇게 해서 10월21일 밤에 항공군관학교내무반에 들어갔어요. 신의주갑부며 일본비행학교출신인 이호 부교장이 나오더니 이제부터 항공학교 생도가 된다고 일장 연설을 하데요. 이때 처음으로 함정에 빠진 것을 깨달았어요. 이튿날 몇 명이 입교를 반대했더니 선임하사란 자가 국가시책을 반대하는 반동분자는 발붙일 곳이 없을 테니 마음대로 하라고 으름장을 놉디다. 이래서 꼼짝없이 주저앉게 된 거지요. 우리들은 학과교육이 끝나면 일본공군조종사였던 허민국 교관으로부터 비행훈련을 받았어요. 얼마 있으니까 주로 일본군출신 조종사들로 소위 교관중대란 것이 편성되더군요.
48년 말부터 우리 항공군관학교 1기생 1백 명은 50명씩 습격기 연대와 추격기연대로 나눠서 맹훈련을 받았습니다. 나는 습격기 연대에 소속됐는데 특별히 선발된 16명에 끼어 단독 비행훈련도 받았어요. 49년12월에 졸업, 중위가 되어 엄포기지에 비행중대장으로 부임했어요. 우리 조종사들은 6개월에 한번씩 정치보위부에 자아비판 서를 써냈는데 이 무렵 내가 지주계급에다 천주교 신자라는 것이 탄로 났어요.

<원산 상공지날 때 고사포탄>
그런데 정치보위부 간부가 조종사 한 명 기르는데 5천 만원을 들었는데 잘 처리 할 테니 너무 근심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도 나는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하루는 대대장이 부르더니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상부의 지시니 중대장자리를 내놓아야겠다는 겁니다. 나는 이때부터 살길은 대한민국으로 귀순하는 것뿐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50년4월28일 새벽에 나는 목숨을 걸고 일생 최대의 모험을 했어요. 그런데 국민학교 때 서울에 수학여행을 다녀온 이외는 남한의 지리를 전혀 모르고있었어요.
28일 새벽 6시기상과 동시에 다른 동료들이 식당으로 가는 틈을 이용, 낙하산을 메고 정비중인 내 비행기로 다가갔습니다.
정비사에게는 태연한 체 하면서 올라타 있다가 정비사가 잠깐 자리를 뜬 사이에 급히 「엔진」을 걸었어요. 날쌔게 뛰어내려 착륙바퀴를 손으로 받침대 밑에 꺾어 넣고 다시 올라가 유도로에도 안 들어가고, 그대로 「마킹·에어리어」에서 「엔진」에 전력을 넣어 이륙을 시도했습니다.
옆 창문도 못 닫고 낙하산도 깔고 앉지 못한 채 강제부양으로 떠올랐어요. 이런 이륙 법은 별로 예가 없을 겁니다. 3천 마력의·출력으로 이륙10분 후 원산상공에 이르니까 고사포탄이 날아옵디다. 마침 원산비행장에서 「도치카」를 파고있던 육군서 내 탈출연락을 받고 쏘아대는 거였어요. 뒤에서는 2대의 비행기가 전속으로 뒤쫓아오고 있구요. 나는 처음에 경원철로를 따라 사리원서 김포로 들어올 계획이었지만 평양서 「야크」기가 뒤따를 것 같아 기수를 남으로 똑바로 돌리고 1백80도 직선거리로 비행했어요.
한참 오다보니 뒤쫓던 비행기는 사라졌는데 연료계기가 쑥 내려가 있어요. 연료를 아끼려고 속도들 줄이고 아무리 무전연락을 취해도 안돼요. 김해 비행장 위를 한바퀴 돌고 흰 손수건을 꺼내 손에 묶어 가지고 창 밖으로 흔들어 투항의 신호를 해도 반응이 없어요. 될 대로 되라는 생각에서 그대로 착륙하는데 활주로가 짧아 밭으로 벗어났어요. 창을 열고 나오니까 그제 서야 초소에서 보초를 보던 순경이 웬 사람이냐고 물읍디다.
이북에서 귀순하는 조종사라고 했더니, 얼싸안고 반가와 하더군요 .얼마 후 서장과 미군소령이 오고 부산CIC에도 연락이 돼 이제 살았다는 생각이 듭디다. 나는 김해에서 장성환 중령이 조종하는 L-5를 타고 서울에 올라와 우선 공군본부로 가서 북괴공군에 관한 정보를 소상히 이야기했어요. 그때 북괴는 2백 여대의 전투기를 갖고 있었지만 실제로 숙달된 전투조종사는 30여명밖에 안됐어요.
소련서 비행기만 많이 얻을 욕심에서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조종사는 얼마든지 있다고 거짓말을 한 거예요. 그리고 내가 탈출할 때 그들은 남침준비를 거의 끝내고있었어요. 5월15일에 「캐나다」서 사온AT-6기10대의 헌납 식이 있다고 해서 가보았더니 북괴의 IL-10이나 「야크」9에 비해 아주 보잘것없었어요. 큰일났구나하는 생각이 나데요. 이 식전에서 이대통령은 잘했다고 내 어깨를 두드려 주더니 이북 가족이 괜찮을까 걱정해주시더군요. 북괴 공군에 비해 한국공군의 정비 기술만은 놀라왔어요.

<비행기조립기술에 감탄>
내가 몰고 온 IL-10 기가 김해에서 김포로 오다가 천안서 불시착했는데 정비사들이 이를 해체해와서 말끔히 조립해놓은 것을 보고 그 기술에 감탄했습니다. 나는 5월16일부터 보도과장 김지수 대령과 함께 전방과 전국을 돌면서 북괴는 전쟁준비를 마쳤고 틀림없이 5,6월에는 남침하리라는 강연을 하고 다녔습니다.>
◇주요일지(1951년9윌11·12·13일)※9월11일 ▲인제 북방서 격전 ▲「유엔」군사령부, 10일의 미군 기 개성 중립지대 오사 사건을 사과 ▲거창군 재, 신성모씨를 증인으로 채택 ▲「체코」에 친소정권출현.
※9월12일 ▲「밴플리드」8군 사령관, 아직도 휴전회담 희망 있다고 언명 ▲2백50명의 국군장교 미국유학.
※9월13일▲아군 평강남방서 후퇴▲이대통령, 군 훈련소 시찰.

<알림>「민족의 증언」문의나 연락 전화는(28)-8211(교환)의 74번, 일당일과야간은(94)-3415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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