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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의 영향을 실증|일본 나량현 고분벽화발견의 의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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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고구려고분벽화와 상당히 유사한 고분벽화가 26일 일본 나량에서 발견됨으로써 일본학계는 물론 한국학계에도 커다란 파문을 던졌다.

<「아스까」 문화>
일본 나량현 고시군 명일향촌 상평전의 고송 총에서 발견된 벽화들은 전쟁 후 일본최대의 고고학적 발견이라고 평가되는 「아스까」(비오)시대 장식고분의 채색벽화였다.
백제성왕이 불상을 전해준 552년에서 「대화개신」이 이루어진 645년까지의 기간을 일본의 「아스까」시대라 하지만 「아스까」는 당시 왜국(후에대화)의 수도 나량현 고시군 비오를 지칭하는 말이다.
고송 총이 있는 마을 명일향도 「아스까」라고 발음되는 것은 비오와의 연관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옛 국도 나량이 한국어의 국가를 뜻하는 「나라」에서 발음을 좇은 것이라는 해석과 함께 상당히 흥미로운 사실이다.
그 비오문화가 삼국 특히 백제의 산물임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고구려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고구려 승혜변이 당시 일본의 지배자 소아마자의 스승이었고 혜자가 성덕태자의 스승이었던 것, 그리고 운총·승강·혜관·법정 등 승려가 일본에 불교를 펴는데 공헌한 것도 역사의 기록이다.
고송 총이 고구려고분벽화에 나오는 사신 도나 인물상을 닮은 벽화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그 당시의 고구려문화의 영향을 실증하는 것이다.
특히 고대일본의 지배계층을 형성했다는 기마민족이 고구려 등 대륙의 이주민임을 입증할 수 있는 고구려문화의 일본전수를 뒷받침하는 것으로서 다시 해석되기도 한다.

<고구려고분벽화>
고구려고분벽화 가운데는 쌍굴총·강서고분 등이 주로 알려졌지만 고송 총 벽화는 황해도 안악3호분(49년 발굴)과 더욱 유사하다고 일본학자들은 보고있다.
만주 집안부근·대동강유역·황해도 재령강유역에 주로 몰려있는 고구려벽화들은 고구려미술의 우수성을 입증하는 것. 화법·기교의 우수성은 힘있고 우아하고 절묘해 일찍부터 일인들의 감탄을 받아왔다.
집안현통강의 무용총·각저총·사신 총과 대동강유역의 쌍용총·경신총 등은 좋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들이다.

<고구려문화의 전수>
이번 발견은 고구려문화의 전파라는 역사적 기록의 단편적 증거를 구체화하는 사실로 해석되기도 한다.
김상기 박사는 『일인들도 시인하는 바지만 고대일본문화가 한국문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은 분명한 것으로 이번 발굴은 두 나라 문화 교류사 연구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고 봤다.
이번 고분벽화가 또 그 가치 면에서 비교되고있는 법강사금당 벽화의 낙사상과 석가삼존불도 실상 고구려인 담징이 그렸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 담징이 채화법과 종이·먹·맷돌제조법을 일본에 전한 것도 역사에 기록돼 있는 것이며, 오경을 전한 것도 그였다.
이런 면에서 고구려 기예의 일본전수는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며 고구려·일본문화교류사실도 새삼스런 발견일 수는 없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김원용 박사(서울대문리대·고고학)는 『삼국의 문화가 일본에 간 것은 다시 말할 것 없이 분명한 것이니까 새삼 강조할 것도 없다. 이번 발견은 일인학자들도 고구려의 영향으로 보고 있는 만큼 정확하게 또 정당하게 보는 것 같다. 앞으로의 문제는 그들의 자세한 보고서가 고고학의 교우편년 결정에 있어 도움을 줄 수 있게되길 바라는 것이다. 냉정한 학술적 연구가 기대된다』고 했다. 그러나 문화교류문제에서도 역사적 의미를 이 발굴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에서의 벽화고분은 주로 북구주 지방에서 발견되었으나 이것이 일종에 변두리지역 발견이라면 이번 발견은 국도인 나량에서 발견됐다는 점에서 의미를 새롭게 할 수 있다.
윤무병 학예관(국립박물관)은 『고구려고분이 통구나 평양 등 문화중심지인 당시의 국도부근에서 발겨된 것과 이와 유사한 벽화가 일본의 당시 국도부근에서 발견된 것은 문화적으로 직접 연결되는 어떤 특성을 발견케 한다』고 설명했다.
구주지역의 고분벽화들이 비록 채색벽화로 나타난 것이 있으나 문양을 주로 그린 것이고 사신을 그린 것이 있으나 유치한 단계에 있었던데 비해 이번 것은 한층 격에 맞고 세련된 점에서 고구려와 직접 연결, 비교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흥미롭다는 것.
구주 죽원 고분에도 말과 인물이, 진부총고분 벽화에도 두꺼비의 모양이 고구려 것과 비슷한 면을 보였으나 수준으론 비교할 수 없었다.
『5∼6세기에 이루어진 고구려고분벽화를 7세기쯤 「아스까」시대 일본은 직수입한 감이 있다』고 윤 학예 관이 설명할 정도로 이번 발굴벽화는 고구려 것에 유사하다.

<한·일 벽화의 비교>
그렇기는 하나 『벽화의 내용과 크기는 아직도 고구려 것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빈약한 것』이라고 황수영 국립박물관장은 설명한다. 질적으로 현격한 차이가 있지만 벽화들은 비교의 여지가 있다.
비록 성좌들이 고구려 것이 먹칠, 나량 것이 점은 금색, 선은 주칠인 것, 나량 것의 여인상이 부채를 든 모습을 보인 것 동은 중국적인 영향으로 우리 것과 다르게도 보인다.
그러나 여인들이 입은 치마, 웃옷의 옷깃을 오른 쪽이 나오게 여민 모습, 뒤쪽을 꼬부려 붙여 올린 머리모양, 허리에 때를 두른 것 등 비슷한 면이 너무 많다.
이런 점으로 봐서 이 고분이 일부에선 일본에 망명한 고구려 귀족의 것으로 해석하고 또 혹시 고구려 유민의 작품이 아닌 가고 추측도 한다.
그 추측은 고송 총이 「일본서기」등 일본사서에서 「귀화인의 마을」로 지칭하는 회한에 가깝다는 사실 때문에도 나오는 것 같다.
어떻든 이런 문제는 아직 확언할 수 없는 것이나 벽화와 함께 고분에서 나온 칠관조각, 당시대 해수구 도경, 사람의 뼈 등은 고고학·미술사·복식사·종교사 등 연구에 새로운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공종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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