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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첨|김학수<외대교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한나라의 역사가 잘못 선택 된 간신들의 제물로 화한 예를 우리는 수많이 알고 있다. 언제나 간사한 모리배들은 의로운 충신보다는 더 기세를 떨치는 법이고 자기의 거짓진실과 거짓능력을 그럴듯하게 꾸며 보이는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무능한 비겁자들이 자신의 출세를 위해 즐겨 사용하는 방법가운데 「아첨」이란 매개물이 있다.
그러나 아첨에도 여러 가지가 있어서 우선 세상의「플레이보이」들이 여자를 낚는 데 있어 가장 유효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도 「아첨」이란 무기이다. 그런가하면 용돈을 뜯어내려고 알랑거리는 천진난만한 자식들의 아첨, 사랑하는 연인들간의 구김살 없는 아첨, 시부모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호들갑을 떠는 며느리의 아첨. 그러나 같은 아첨이라도 대머리가 까진 의젓한 중년 사내가 새파란 상관 앞에서 연방 굽실거리며 필요이상의 아첨을 떠는 꼴은 정말이지 구역질이 날 정도로 매스껍다. 더욱 차원을 달리하여 「아첨」이란 괴물이 정치적인 탈을 쓰고 도약을 할 때면 국가의 존망을 위태롭게 할 사태로까지 이를 수도 있는 것이다.
자유당말기에 가짜 이강석이가 「귀하신 몸」의 대접을 받으며 영남일대를 휩쓸고 다닌 적이 있다. 이때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백년전의 「홀레스타코프」(고골리의 『검찰관』에 나오는 주인공)가 한국에 되살아났다고 「가십」난에 비꼬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1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황당무계했던 가짜 이강석의 행각보다는 오히려 「귀하신 몸」에게 갖은 아첨을 다하며 추태를 부리던 지방장관·경찰국장·군수·읍장들의 전전긍긍하던 모습들이다.
「아첨」은 아직도 우리 주위에서 활개를 치고있다. 관료주의는 정실을 낳고 정실은 아첨을 강요한다. 관료주의가 심할수록 무능한 아첨 배들은 출세를 하고 유능한 정의파들은 뒤떨어진다. 이럴 때 「아첨」은 「무능」과 「비굴」의 대명사가 아니라, 「유능」과 「성실」의 동의어로 둔갑되고 마는 것이다.
하긴 요즘처럼 「가짜」가 판을 치고 있는 세상이고 보면 아무리 양심적인 위정자나 경영자라도 과연 누구가 유능하고 누구가 성실한지 구별하기도 힘들 것 같다. 어느 누구도 신의 혜안을 가지지 못한 이상 남의 뱃속까지 꿰뚫어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럴 대 나는 「유능」과 「무능」을 가려내는 한 방법으로 「아첨」의 척도를 그 기준으로 삼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러면 백 명의 아첨꾼보다도 한 명의 의로운 콧대센 부하가 소중하다는 것을, 그리고 백마다의 감언이설보다도 한마디의 솔직한 직언이 더욱 유익하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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