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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경기장은 팬에게 꿈을 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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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미국 프로축구 시카고 파이어의 홈 구장 토요타 파크(위)와 미국 프로미식축구 디트로이트 라이언스의 홈 구장 포드 필드(아래)는 스포츠라는 컨텐트를 팬에게 판매하는 장소로 설계됐다.
디트로이트의 홈 코메리카파크 내야석은 고급 목제 의자와 테이블이 있다(사진 위). 프로농구 디트로이트의 경기장 내부는 호텔처럼 꾸며져 있다(사진 아래). [사진 로제티]

“더그아웃 천장 만들어 모두 볼 수 있도록 하면 어떨까요.”

 미국 스포츠 건축설계 회사인 로제티(ROSSETTI)에서 프로젝트 매니징과 디자인을 맡고 있는 정성훈(43) 이사의 말이다. 그는 “좋은 경기장을 만들려면 설계 단계부터 구단의 철학이 담겨 있어야 한다. 그 바탕 위에서 스포츠 콘텐트 판매를 통한 수익 창출을 꾀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기장 건설은 단순히 건물을 짓는 게 아니라 꿈을 파는 공간을 창출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정 이사는 미국 스포츠 설계분야에서 일하는 유일한 한국인이다. 16년간 스포츠 현장에서 미국 메이저리그(MLB)와 프로축구(MLS), 프로농구(NBA) 등 주요 구장 건설과 리노베이션 작업에 참여했다. 디트로이트의 홈구장인 코메리카파크, 클리블랜드의 프로그래시브필드 등에 그의 손이 닿아 있다. 서울시와 프로·아마야구 현장 및 학계 전문가 등이 참여한 ‘서남권 돔야구장 활성화 및 서울시 야구 발전을 위한 특별 심포지엄’에 초청된 정씨를 만났다.

 - 스포츠 건축설계가 우리에겐 좀 낯설다.

 “연세대 건축학과를 졸업한 뒤 1998년 미국 미시간 대학원에서 건축 석사과정을 마쳤다. 졸업 후 들어간 건축사무소에서 미시간 대학교 내에 있는 테니스장과 체조경기장 설계를 담당하며 스포츠 경기장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후 미국의 프로 경기장 설계와 건축, 개·보수를 전문적으로 하고 있는 로제티에 입사했다.”

 - 한국에서 여러 경기장 건설 현장을 찾았다.

 “미국과 접근 방식부터 다른 것 같다. 미국은 경기장을 스포츠 콘텐트를 파는 그릇이라고 생각한다. 소비자의 구매욕을 최대화할 수 있도록 설계한다. 반면 한국은 빌딩을 짓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라운드나 라커룸·화장실과 소변기 개수에 집착한다. 이런 것들은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조건이다. 가령 ‘왜 서울 고척동에 야구 돔구장을 지었는가’라고 물으면 ‘입지조건이 좋아서’라는 답이 돌아온다. 무엇을 위해 짓는지 철학이 빠졌다.”

정성훈 이사

 - 철학이라….

 “구단의 지향점이다. 스포츠 구단은 팬에게 콘텐트를 팔아 수익을 내야 한다. 수익이 나야 스포츠 전반에 재투자가 이뤄진다. 이런 선순환이 되려면 팬이 소비를 할 수 있도록 최적화된 방식으로 구장을 만들어야 한다. 경기장을 스포츠 산업적 측면에서 바라보고 설계해야 하는데 아직 한국은 건축 그 자체만 바라보고 짓는다.”

 - 어떻게 설계해야 소비를 늘릴 수 있는가.

 “철저하게 소비자 입장에서 접근해야 한다. 크게 보면 구단은 티켓과 음식을 판매해 수익을 낸다. 경기를 보면서 동시에 음식을 살 수 있고, 옷도 살 수 있는 구조를 ‘콩코스’라고 한다. 미국 내 상당수 프로구단은 경기장을 지을 때 콩코스 방식을 선택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경험을 디자인하는 것이다. 경기는 TV로도 볼 수 있다. 팬이 시간과 돈을 들여 구장에 나오는 건 현장에서 경험을 하기 위해서다.”

 - 미국 사례를 들자면.

 “리노베이션 작업에 참여했던 NBA 팀인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의 홈구장을 꼽을 수 있다. 이 구장은 VIP들이 이용하는 스카이박스를 바닥으로 끌어내린 ‘벙커 스위트’를 갖추고 있다. 벙커 스위트를 이용하는 팬들은 농구 코트와 같은 층에서 선수들이 뛰고 땀 흘리는 모습을 실감나게 볼 수 있다. 선수 교체를 할 때는 그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특별한 경험도 할 수 있다. 선수와 스킨십을 하고 접촉할 수 있는 면적을 늘려야 한다.”

 - 야구장은 어떤가.

 “야구는 티켓에 따라 불펜과 더그아웃 등을 볼 수 있도록 설계한다. 자신이 특정 투수를 좋아하면 더 많은 돈을 내고 불펜을 볼 수 있는 좌석을 산다. 팬들은 선수들이 몸을 풀고 연습투구를 하는 장면을 보고 희열을 느낀다. 아직 구상단계지만, 라커룸 천장을 유리로 덮어 VIP들이 라커룸을 엿보며 경기를 관전하는 방법도 상상할 수 있다.”

 - 프로축구 인천의 홈구장 숭의아레나의 설계에도 참여했다.

 “경기장은 전체 도시발전 계획 안에서 지어져야 한다. 경기장 하나만 짓지 말고, 주변 상권을 함께 발전시켜야 구단도 수익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다. 한국은 토지만 확보되면 짓는 경우가 있다. 30년 뒤를 내다본 스포츠 구장을 지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서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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