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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속의 「관망」…금융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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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금융계 쇄신 작업이 막바지에 이른 요즘, 은행 임·직원들은 한결같이 『무서워서 일 못하겠다』고 불안한 표정들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렇잖아도 한달 밖에 안 남은 시은 주총(4월 하순)에 앞서 비 금융인 등용설까지 번짐으로써 은행의 상층권부터 흔들리고 있는 상태. 웃사람들이 들떠있으니까 자연히 밑에서도 동요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비 금융인의 기용 가능성은 식산 은행 (산은 전신) 출신이긴 하지만 김우근 상공부 차관이 외환은행장으로 전임된데 이어 산은 감사로 재무부 재산관리관이 임명된데서부터 비롯됐다.
더구나 서정 쇄신과 관련하여 정부 관리 기업뿐 아니라 시은 감사에도 임명제를 검토해 보라는 고위층 지시가 있었고, 이미 정부 투자 기관 감사 준칙이 마련되어 감사의 지위를 높이고 자체 감사 기능을 대폭 강화하는 조치까지 끝나 있기 때문에 비 금융인의 금융계 진출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더욱 커진 것이다.
남 재무는 기자 회견에서 『그런 계획이 없다』고 부인했지만, 일부에서는 감사의 기능이 집행부 일을 맡는 것이 아닌 만큼 전문적 기술이 필요한 것은 아니며 『감사로 있는 동안 은행 업무를 익히면 금융인이 되는게 아니냐』는 설명도 나오고 있어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실정이다.
어쨌든 금융계는 지난 64년에 민간 주주 대표로 서울 은행 감사에 선임되었다가 비 금융인이란 이유로 은행 감독원장이 「비토」, 자리에 앉지 못했던 은행 인사의 선례가 이번에 깨지는 것이 아니냐는데 대해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대체로 보수적이고 소심한 금융인들은 이 가능성의 진위를 가리기에 앞서 겁부터 먹고 있다.
『이제 우리는 모두 물러가라는 말이냐』는 간부급 직원들의 얘기에 젊은 행원들은 『비 금융인이 들어온대도 금융 업무의 전문성을 터득하지 못한 이상 오래 붙어있거나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반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비 금융인이 대거 진입해 와서 세력권을 형성하면 재래파 금융인들이 그들의 수를 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H은행 K이사의 말에는 모두들 수긍하고 있다.
또한 불건전 채권 정리와 관련된 인사 문제는 『3월말까지 불건전 채권을 정리하겠다』는 시한부 각서를 제출했던 것을 5월말까지로 연장 결의, 4월 주총의 고비를 피해 놓긴 했지만, 그 동안의 실적과 견주어 보면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각 은행은 채권별로 정리 시한을 정해놓고 전담반까지 편성, 뛰고 있는데 요즘은 여·수신 업무보다 불건전 채권 정리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게 일반적인 얘기다.
심지어 총재나 행장들이 채권 정리와 관련하여 관계 부처 협의 또는 회의에 매달려 있어 외부 손님을 만나는 시간커녕 행 내의 중역들도 하루에 한번 대하기가 어렵고 신경은 점점 날카로 와져 가고 있다는 얘기가 새 나오고 있다.
오는 4월 주주 총회를 계기로 임기가 끝나는 시은 임원들은 모두 18명.
행장 1명 (서울은행)에 전무 3명, 상무 14명이다.
이 밖에 상반기 중에 임기가 끝나는 국책 은행 이사 2명이 있다.
이 금융계 인사는 남 재무가 4월17일에 ADB (아시아 개발 은행) 연차 총회에 참석한 다음 주주 총회가 끝나야 돌아오기 때문에 남 재무 출발 이전에 대체로 내정이 끝날 것이며, 따라서 벌써부터 「줄다리기 경주」가 시작됐으리라는 관측이다.
남 재무의 인사 원칙은 같은 직급에서 2기 이상의 중임을 피하고 10개 경영 평가 기준을 엄격히 적용하겠다는 것.
그러나 이번 인사에서는 지금까지 80%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해 온 것으로 알려진 남 재무가 잇단 금융계 비위 사실과 외환은행장 사건이 치명타가 되어 『종전처럼 영향력을 발휘하기는 어렵게 됐다』는 얘기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반면에 서정 쇄신이란 큰 전제가 깊이 개입할 가능성도 있어 내부 기용 중심의 인사 원칙이 이번에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감사원 감사를 통해 적발된 비위 임직원 2백75명을 무조건 3월말까지 해임시키라는 농림부의 지시를 받은 농협도 처음에는 크게 당황했다.
이들 대상자 가운데는 상당수가 『유능하고 의욕이 있는 직원』들로서 의욕적으로 일을 하다보니 비위도 있을 수 있었으리라는 얘기다.
따라서 농협 입장으로는 의욕적인 이들을 해임하기보다는 오히려 무능하고 소극적인 직원의 도태가 더 시급하다고 판단, 옥석 구분을 위해 대리급 이상 전직원의 사표를 받았는데 부장급 이상은 자진 사표를 냈으나 그 이하에서는 사표를 강요했다 해서 새로운 불씨가 되고 있다.
작년 11월부터 실시된 금융 정상화 조치로 은행 직원들의 수입이 줄어든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인데 외환은·농협 사건으로 새로운 감사 선풍이 일자 은행원들의 수입은 또 한번 대패질을 당하게 됐다. 경비 지출의 다과들을 따지기에 앞서 전체적인 규모를 줄이려는 금융 기관 예산 축소 조정 작업이 지금 관계 당국에서 진행되고 있다.
금융 기관의 발간비·접대비·후생비를 깎을 대로 깎은 건 작년 11월의 얘기고, 요즘 새로 나오는 「아이디어」는 금융 기관 임원실의 여 비서를 없앤다는데까지 이르고 있다.
정부의 「아이디어」답지 않은 이 「아이디어」는 『은행 이사가 비서의 도움 없이 어떻게 업무를 처리하겠느냐』는 강한 반발에 부딪쳐 즉각 무산되기는 했지만, 은행으로서는 앞으로 이런 류의 얘기가 또 어디서 나올지 몰라 몹시 불안한 표정.
이렇게 되자 한은의 경우 「엘리트」 간부들은 중앙은행을 버리고 타 기관으로 전출하려는 움직임이 최근에 부쩍 늘어났다.
이 같은 금융인의 불황과 위축은 그대로 업무에 반영되어 중앙은행·시중은행이 모두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느낌.
외환은행의 한 간부는 『조심하는 분위기 때문에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걱정했고, 어느 시은행원은 『웃 사람들이 넋을 잃어 우리는 눈치만 보고 있다』고 실토했는데, C은행장은 계속 『면목이 없다』고만 말할 뿐 묘안은 없는 모양이다. <이종호·박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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