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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리에르」의 생애와 작품 세계|그의 탄생 3백50주 기념 학술 강연회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극작가 「몰리에르」의 탄생 3백50주를 맞은 기념 축전이 지난 21일부터 서울에서 시작됐다. 첫 행사인 학술 강연회는 『몰리에르의 작품 세계』 (박은수·숙대) 『인문 몰리에르』(정병희·이대)를 주제로 21일 하오 5시 「드라머·센터」에서 열렸다. 이날 두 교수의 강연을 중심으로 「몰리에르」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알아본다.
「몰리에르」의 생애는 그가 연극에 투신하는 21세까지의 전기와 그로부터 15년간의 유랑생활, 그리고 성공을 거둔 후부터 죽을 때까지 15년 동안의 3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순수한 「파리장」|풍자·냉소적 기질>
본명이 「장·바티스트·포클렝」인 「몰리에르」는 귀족이 아닌 「부르좌」 출신으로 궁정에 출입하는 실내 장식가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순수한 「파리」태생인 그는 「파리장」 작가들이 갖는 공통점인 사회를 바라보는 예민한 안목과 소박·단순하며 냉소적·풍자저인 「프랑스」인 기질을 고루 가졌다.

<11살 때 모친 잃고|모정 모르고 성장>
물질적 고생은 하지 않아 일류 학교에 다니면서 고전을 탐독했고 대학에서는 법률을 전공했다. 11세 때 어머니를 여의어 가정 생활은 불행했으며 따듯한 어머니의 애정을 모르고 자라났다.
대학을 졸업한 후 21세 때 극단 「광명」을 조직, 「몰리에르」란 예명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모두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1658년까지 15년간은 지방 순회 공연 등 유랑 생활이었다.
연극인으로서 평탄치 못한 초년기를 보낸 후 36세 때부터 인정을 받기 시작, 1659년 그의 첫 걸작이며 출세작인 『재치를 뽐내는 아가씨들』을 발표했다. 그후부터 1673년 그가 죽을 때까지 15년간 30여 편의 걸작들을 남겼다.
「몰리에르」는 비극만이 극예술로 되어 있던 17세기 「프랑스」에서 비극에 맞설 수 있는 희극을 창조해냈다. 왕·왕비·귀족들만이 주인공인 고전 비극은 귀족들을 위한 예술이었지만 「몰리에르」의 작품에는 왕은 나오지도 않으며 가장 천대받는 사람들을 주역으로 등장시켜 소박하고 무식한 그들을 통해 당시의 사회를 풍자했다.
그의 희극은 웃기는 사건들로만 엮은 단순한 소극이 아니라 웃음 속에서 생각하고 느끼게 하는 무엇인가를 담고 있다.
이것이 바로 「몰리에르」가 다른 희극 작가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며 또 그의 위대한 점이다. 그는 흩어진 희극적 요소들을 하나로 통합해서 「프랑스」 국민적 희극을 창조해낸 것이다.

<비극 위주 17세기|희극 만들어 출세>
그는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는 희극적 요소를 인간의 성격에서 끌어냈다. 『미장트로프』 (괴짜)에서는 사회와의 타협을 모르고 고지식하기만 한 「알세스트」란 괴짜를, 『수전노』에서는 돈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가족에게까지 버림받는 「아르파공」이란 구두쇠를 그려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자연과 인간의 본성에서 벗어나는 모든 인간을 무대에 올려 웃음거리로 만든 그는 충실한 현실 생활을 강조하는 낙천주의자라고도 할 수 있다.
모성애를 모르고 자란 그는 작품 속에서 따뜻한 모성으로서의 여성상은 한번도 그리지 않았고 떠들기 좋아하고 허영심 많은 「부르좌」 여성을 주로 그렸다. 여성이 여성답지 못할 때는 가차없이 「메스」를 가했던 것이다.

<20세 연하와 40세 때 결혼>
40세 때 20세 아래의 「아르망드·베자르」와 결혼했던 그는 결혼 생활에도 실패했다. 그래서 그는 극중에서 돈만 보고 늙은이와 결혼한 젊은 여성을 곧잘 그렸고 또 젊은 여자와 결혼한 늙은이를 웃음거리로 만들어버렸다. 바로 자기 자신을 무대에 올려놓고 신랄하게 비판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가 대단한 용기를 가진 작가였다고 볼 수 있다.
지배 계급 등을 과감히 비판, 그로 인해 많은 압박도 받았던 「몰리에르」는 희극을 통해 사회의 악습과 인간의 나쁜 점을 교정했으며 풍자를 통한 사회 고발 정신으로 작품 세계를 일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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