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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의 세계와 낙원을 그리며…|고 이중섭 유작전 19일부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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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낙원을 그리며 역경을 헤매다가 숨진 한 뛰어난 화가가 그가 남긴 숱한 낙원도를 통해 따스한 체온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우리 나라 현대미술사의「천재」혹은「기재」로 첫 손꼽히는 그는 「대향」이란 호를 가진 이중섭 화백이다. 그가 세상을 등진 것인지 세상이 그를 버렸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어쨌든 사후 16년만에 이를 애석히 여기는 사람들의 정성에 의해 처음으로 본격적인 유작전을 마련, 19일 하오 현대화랑에서 개막된다.
26일까지 계속될 이 이중섭전에는 유화·수채화·은박지 그림·연필「데셍」등 약 1백 점이 출품된다.
전시되는 작품이 유작의 전부라 할 수는 없지만 뜻밖에 그의 작품을 애지중지 간수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의 생전 기류지인 서울을 비롯해 대구·부산·통영·진주 및 멀리 제주에서까지 작품을 소중히 싸들고 모여들었다. 그것은 한 천재작가의 산산이 홑어져 있는 분신들을 모아보고 싶은 소장자들의 공통된 심정의 결실.
이중섭씨는 소년과 물고기·게·새·소·꽃 같은 소재를 즐겨 동화의 세계에 이끌어 넣어 향토색 짙게 표현한 유화가 이다. 그 동화의 세계는 화평하고 고요하지만, 극히 천진난만하게 생동하는 움직임으로 구성돼 있다. 작품들은 어느 것이나 감각적인 얘기를 풍부히 담고 있다. 그리 정성들인 것 같지 않은 붓 자국임에도 그것은 익숙하고 「리얼」하기가 그야말로 개성적인 기법. 그의 언어가 함빡 울려나오는 작품들이요, 글로 다듬어지기 이전의 시와 산문들이다.
1956년9월 40세로 요절한 그는 당시 그의 측근에 한 사람의 가족도 없었다. 흔히 그가 미쳐 죽었다고 하고 혹은 굶어죽었다고 할만큼 그의 말년은 고독과 열망의 범벅이었다. 그는 서울의 적십자병원에서 운명한 뒤에도 무연고자로 취급돼 3일간이나 시체실에 방치 돼 있었다. 사실 최후의 20개월은 정신병자로서 자기학대에 빠졌고 심지어 식음을 거부했다고 전한다. 세계의 여러 천재의 생애가 그러하듯이 그는 세속에 휘말리지 않는 이질적인 사고와 행위로 일생을 점철했다.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밝혀진 얘기지만 중학4년 때 낡은 오산학교교사를 다시 짓자고 한밤중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또 그 나이에 소의 넋을 송두리째 빼앗겠다고 매일같이 들에 나가 소와 살다시피 했다고도 한다. 또 일제의 국어 말살운동에 반발, 한글자모만으로 「콤퍼지션」을 하기도 했다. 엽서를 수 백장씩 사다가 끊임없이 「에스키스」를 반복했다.
그는 해방직전에 일본문화학원의 후배인 일본여성과 결혼해 원산에서 살았다. 8·15후 공산치하에서 초상화를 그리지 않아 돌림을 받았다. 그의 성미는 미술교사도 맞지 않아 1주일만에 사퇴해버렸다. 그는 동란중 국군의 후퇴시에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남하했는데 그것이 50년12월.
현존하는 그의 작품은 모두 그 후 6년간의 것들이다. 그의 생애의 전반은 소의 표현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부유한 가정의 막내였고 늘 불만 속에서 탈출을 기도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남하한 지 2년만에 생활고 때문에 두 아들과 부인을 일본으로 보낸 뒤 그의 작품은 온통 가족에 대한 그림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림을 통하여 마주 대하지 못하는 가족과 무진장의 대화를 나누고있다. 그는 부두노동도 했고 극장무대장치도 했다. 그러나 전란중의 예술가는 사회적으로 버림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림 그릴 「오일·페인트」도 「캔버스」도 없는 까닭에 길거리에 버려진 양담배 갑의 은지를 주워 모아 못 꼬챙이로 그림을 그렸다.
그게 바로 미국의 현대미술관에까지 수장된 은지화. 이중섭 하면 은지 그림을 연상할 만큼 유명한 것인데, 언젠가 유화를 그릴 때가 되면 바탕을 삼을만한 「스케치」요 「데상」으로 모았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대로가 완성된 작품이다. 그는 대작을 끝내 못 남겼지만 벽화까지 구상하고 있었다는 후문이다. 현존 최대의 유화가 30호 짜리 『도원도』.
이 유작전은 지난 1월에 구상되어 전격적으로 진행됐다. 시인 김광균씨를 위원장으로 하여 구상 박고석 최정우 이경성 이귀열 이학석 이흥우제씨가 모였고 「스폰서」는 현대화랑.
이러한 일은 국립미술관에서 해야 할 일이지만 국가기관과 미술대학은 물론 화우들 사이에서도 생각조차 않는 일이기에 그를 아끼는 제3자들이 준비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전작이 모아지는 이 모처럼의 기회를 뜻깊게 하기 위하여 화집도 마련했다. 이미 사라진 한 작가가 10수년만에 체온으로 되살아나는, 화단의 따스한 화제를 만들고 있다. <이종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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