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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제자 윤석오>|<제26화>경무대 사계(37)|고재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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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안 통하는 변명>이 박사는 공정을 행정의 기본으로 했다. 후일 다시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특히 인사행정엔 무던히 신중을 기하고 보다 적임자를 찾으려고 애썼다. 그런데 어쩐 셈인지 정부고위관계자의 비행을 폭로하는 투서가 너무 많이 경무대로 보내져 왔다. 투서가운데 다소는 근거가 있는 것도 없지 않았지만 대부분은 중상모략이 많았다. 투서내용은 별별 것이 다 있었지만 대체로 돈을 얼마만큼 떼먹었다든가 여자관계가 좋지 못하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투서들 속의 한 얘기지만 한번은 엽서 일곱 장이 배달됐는데 모두가 어느 장관 한 사람을 중상한 것으로 그 내용이 모두 같았다.
이상해서 비서실서 조사를 해보고 있는 중이었는데 하루는 이 대통령이 부르더니『고 비서, 나한테 투서가 많이 왔다는데 알고 있나?』고 물었다.
알고있다고 대답했더니 『왜 나한테 보고하지 않았느냐』고 화를 냈다. 그래서 『투서가 필적은 다르지만 내용이 모두 같은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어 조사중』이라고 했더니 빨리 보고하라고만 했다.
나중 알아보았더니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모 국회의원이 투서를 여러 장 보내놓고 경무대에 들어온 기회에 이런 사실을 이 박사에게 말했던 것이었다.
후일 이 의원의 점잖지 못한 행동이 밝혀진 뒤 그 국회의원은 경무대로 이 박사를 만나러 오지 못했다. 나 자신에 관한 얘기지만 내가 53년 화폐개혁으로 경무대를 그만두게된 것도 모략에 의한 것이었다. 나중 사실이 밝혀져 8개월간 쉰 후 서울 부시장으로 일하게 됐지만….
그 때 이 대통령은 나를 부르더니 『화폐개혁이 내 뜻대로 안됐어. 자네하고 임 비서(임철호씨), 모 국회의원이 한패가 돼서 그랬다고 하더구먼.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게』라고 했다.
그런 일이 없다고 했더니 이 박사는『○○장관이 그러던데… 사실이 아니면 자네가 사실을 밝혀보게』라고 했다.
나는 사실을 밝혀보라는 대통령의 진의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발설했다는 사람을 찾아가 사실여부를 물었더니 『그런 일은 없다』고 했다.
다시 대통령을 찾아가 『○○장관은 사실이 아니라고 하더라』고 했더니 『그럼 ×월×일 국무회의에 나가 변명하게』라는 것이었다.
『대통령을 가운데 두고 당사자끼리 국무회의에서 대면해서 다룰 수 없는 일이니 못하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마침 옆에서 듣고있던 「마담」은 나한테 『그건 한국식 사고방식이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고 비서가 그런 일을 저지른 것으로 되지 않느냐』고 해서 이 대통령이 말한 그날 국무회의실에 갔다.
같이 그만 두게 된 임철호씨와 함께 국무회의실에 가긴 갔지만 끝내는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와 버렸다.
나 자신 변명같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 박사의 성품을 알리기 위해서다.
이 박사에겐 변명이란 게 통하지 않았다. 이 대통령이 나한테『○○장관이 그러던데… 사실이 아니면 자네가 사실을 밝혀보게』라고 한 말은 『그만 두라』는 얘기였다.
내가 경무대를 떠날 때 이 박사는 나나 임철호씨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모 장관에게 『그 사람들 직장을 마련해 주게』라고 지시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개헌파동을 치렀던 제헌의회도 2년의 임기를 끝내 5월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됐다.
선거결과 의석분포는 무소속 1백26, 국민당 24, 민국당 24, 국민회 14, 한청 10석이었다.
6월19일 개원된 2대 국회는 의장에 민국당의 신익희씨를, 부의장엔 조봉암·장택상씨를 선출했다.
선거기간 중 이 대통령은 전국유세에 나서 민국당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되는 당파위주의 정객을 의회에 등장시키지 말도록 호소했다.
이 같은 이 박사의 유세는 각지방에 영향을 미쳤고 행정력의 견제도 주효해서 내각책임제개헌을 주동했던 사람들 대부분 낙선했다.
그러나 대거 진출한 무소속 중에는 이 박사 지지세력인 친 국민당계보다 친 민국당계와 야당적 무소속이 많아 행정부를 곤란하게 하는데는 제헌국회보다 더한 듯했다.
이 박사는 총선거가 실시되기 전인 4월3일 총리를 포함한 대폭적인 개각을 단행했다.
이범석 총리 후임으로 이윤영씨를 지명, 국회에 인준을 요청했으나 부결됐다. 이러자 이 박사는 그때 가장 신임했던 신성모 국방장관을 총리서리로 임명하고 인준을 요청하지 않고 통고만 했다.
그것은 민국당 세력의 반대로 총리인준이 다시 부결될 가능성이 많다고 판단했기 때문인 듯 했다. 이를 두고 개원 초의 2대 국회는 『국회의 국무총리 임명 동의권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위헌적 처사』라고 임명통지에 관한 대통령 공한을 정부에 반환할 것을 결의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한편 해를 넘기면서까지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국회공산당「푸락치」사건은 50년3월14일 법원의 언도가 내려 일단락 됐다.
노일환·이문원 등 피고인들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3년에서 10년까지의 징역형을 받았다.
선고가 있은 지 2주일 후엔 남로당총책 김삼룡과 이주하가 체포되어 남로당은 뿌리가 뽑혔다
김·이 두 사람이 체포되자 북괴에서는 남한에서의 공산주의운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지 그동안 감금하고있던 조만식 선생을 이들과 교환하자고까지 제의해오기도 했다.
북괴는 또 6월11일엔 이인규 김재창 김태홍 등에게 이른바 「평화호소문」이란 것을 주어 남파시키기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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