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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5)<제26화>경무대사계(32)|고재봉<제자 윤석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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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감찰위는 장관들에 대해서도 잘못이 있으면 가차없이 조사하여 검찰에 제소했다.
내가 경무대에 들어가기 보름전인 2월23일 조봉암 농림장관이 경질되고 이종현씨가 임명됐다.
49년 1월31일 정인보 감찰위원장은 「농림장관(조봉암)의 비행에 관한 통고」를 국회에 제출했다. 내용은 양곡매입의 원활을 기하기 위하여 설치된 양곡매입촉진위원회의 예산에서 농림장관 관사수리비·응접실 비품대·요식대·출장여비 등등의 명목으로 모두 5백만 원을 유용하고…라는 것이었다.
국회는 2월3일 당사자인 조봉암 장관과 정인보 감찰위원장으로부터 증언을 들었다.
조 장관은 『정부기관인 감찰위가 정부의 장관을 비행이 있다하여 공개함으로써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국가에 손해를 끼치게 된 것은 본인의 부덕의 소치라고 보아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명했다』고 전제했지만 비행사실을 모두 부인했다.
이어 정 위원장은 조 장관의 답변을 반박하고 나서 의원들간에 논란이 벌어졌다. 국회는 2월5일 진상조사위를 구성하고, 10일 동안 조사를 한 후 보고서를 제출했다.
서이환 위원장은 『농림장관의 사택은 처음부터 관사로 지정된 것이 아니고 지난 12월8일에야 내정된 것이며 그 수리에 대하여도 국무회의에서 논의만 하였을 뿐 승인을 얻은 것은 아니다.』라고 유용에 있어 일부는 감찰위 보고와 일치하고 일부는 다르다고 했다.
조사보고가 있은 후 국회 본회의는 『감찰위와 농림부의 양편 해석 중 어느 한쪽에 과오가 있다고 지적하기 어려우므로 그 법적 책임은 사직에 맡기고 국회는 이 이상 관여하지 말라』는 동의를 채택하고 손을 뗐다.
이 일이 있은 후 3월31일 감찰위는 또다시 임영신 상공장관의 비행이 있어 면직결의 했다고 국회에 통고해왔다. 통고내용은 48년12월 경북 안동에서 국회의원 입후보 때 귀속사업체인 대구 「메리야쓰」공장관리인 이순희로부터 2백만 원을 벌어 선거비용의 청산에 사용했고 1만5천6백 원에 달하는 공장소유물품을 뇌물로 받아 선거운동에 사용했다는 것 등이었다.
이밖에도 조선광업진흥공사에서 금반지를 수회하고 대통령 탄신축하비용을 갹출, 대통령에게 증정하려다 거부당하고 감찰위에 적발됐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도 조농림「케이스」와 마찬가지로 국회는 조사단을 구성하여 활동했다.
이러는 사이에 감찰위는 임 장관의 파면안을 대통령에게 제출했고 이대통령은 『판결이 나기 전에는 파면할 수 없다』고 담화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대통령은 임 장관을 아끼고 사랑했으나 건국초기의 공무원기강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부득이하다고 판단했던지 검찰의 조사가 진행중인 6월6일 임 장관을 윤보선씨로 바꾸었다.
그후 검찰은 임여사에게 징역 3년과 벌금 30만원을 구형했으나 재판부는 9월17일 무죄를 언도했다.
여하간 정인보 감찰위원장은 두 사람의 장관 목을 자른 셈이다. 결과여하를 막론하고 건국 초기의 감찰 활동은 대단했다. 그런데 조·임 두 장관사건은 동료장관 두, 세 명이 짜고 모략한 것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으나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었다.
얘기가 길어졌지만 이 두 가지 사건은 당시의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얘기한 것이지 다른 뜻은 없다.
이 무렵 이대통령은 건강에 무척 조심했는데 특히「마담」의 보살핌은 정말 극진했다. 간호원이라 하더라도 그런 간호원은 없을 것이다.
매일 하오5시 이후가 되면 항상 「프란체스카」여사는 이 박사를 모시고 경무대 뒷산을 함께 산책하곤 했다. 비가 오면 우산을 손수 받쳐들고 거닐었다.
일 때문에 밖에 나가는 경우 이외에는 매일 1시간씩 규칙적으로 산책했다. 산책을 하다가 작은 나무가지를 전지하기도 하고 썩은 고목덩굴을 도끼질 하든가 또는 톱질을 하기도 했다.
산책을 할 때면 무얼 할지 모르니 비서들은 항상 준비에 바빴다. 도끼·톱 등등을 항상 준비해 두어야했다.
이박사의 건강유지법은 산책 이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고 평소 약 같은 것은 들지 않았다. 물론 술이나 담배도 입에 대지 않았으나 간혹 취침 전에 술을 한잔만 들기도 했다.
「마담」은 인삼이나 녹용이라 할지라도 한약은 질색이었다. 한번은 강원도에서 한 노인이 산삼을 가져와서 달여드리려고 했더니 「마담」이 『안 된다』고 야단을 했다. 언젠가는 이 박사에게 생활비를 댔던 백낙승씨가 가져온 녹용을 김홍식 비서가 달여서 술에 타 드시도록 하려다 혼이 난 적이 있다.
이때 「마담」은 『이 집안살림은 내가 하는 것이야』하면서 화를 냈다. 『이건 한국인에겐 좋은 겁니다』고 설명했지만 『저분은 한국서 산 사람이 아니야, 위장이 서양사람처럼 됐단 말이야』고 극력 반대했던 일도 있다.
그러나 나중 수복 후에는 인삼을 드시게 됐지만 첩으로 지은 한약보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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