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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즐길지어다, 햇살의 선물을 …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49호 23면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보졸레 누보(Beaujolais Nouveau)의 인기는 대단했다. 11월 셋째 주 목요일을 기해 전 세계 와인 애호가들이 동시에 마시는 이벤트는 가장 성공한 마케팅으로 꼽혔다. 11월이 다가오면 호텔마다 가장 큰 홀은 일찌감치 예약이 매진됐다. 어느 와인 사이트는 한강 유람선을 통째로 빌려 선상 파티도 열었다. 신문에도 시즌마다 기사가 실렸다.

김혁의 와인야담 <4> 보졸레 누보를 위한 변명

일본도 마찬가지다. 5층 건물 전체에서 층별로 이벤트를 진행한 회사를 가본 적이 있다. 프랑스보다 9시간 빠르므로 현지인보다 먼저 보졸레 누보를 맛볼 수 있다는 장점(?)을 최대한 살려 1층에서는 인공위성으로 현지와 영상 통화를 하며 분위기를 띄우고 지하 레스토랑에서는 보졸레와 어울리는 음식을 미슐랭 스타 셰프가 요리해 내놓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가 일본에서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사람들이 와인의 품질에 민감해지면서 영원할 것 같던 열기도 사그라들었다. 보졸레 누보는 싸구려 와인으로 낙인 찍혔고, 3~4년도 안 돼 와인 애호가들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사실 보졸레 누보란 프랑스 보졸레 지역에서 만든 햇포도주다. 이 지역 사람들은 포도를 수확하자마자 줄기째 통 속에 넣어 발효시키면 포도의 무게와 발효 중 나오는 탄산 가스의 압력으로 신선한 과일 맛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를 ‘탄산가스 침용’이라 하는데, 인위적인 외부 힘을 가하지 않아 포도 본래의 맛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다. 숙성하지 않고 바로 만드는 보졸레 누보는 포도를 수확한 해의 신선함이 그대로 나타나는 지역주로 숙성된 와인들과는 맛과 향이 많이 다르다. 수확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 농부들이 햅쌀로 만든 농주 같은 개념인 것이다.

그런데 와인의 품질을 너무 따지면서 누보를 마시면 마치 품위가 떨어지는 것처럼 여기게 됐다. 그저 상큼하게 그 해의 햇포도주를 처음 즐기는 정도로 끝나면 될 것을….

더 큰 문제는 보졸레 지역의 모든 와인이 저급 와인 취급을 받게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보의 실패 이후 보졸레를 수입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좋은 보졸레 크뤼(보졸레 지역 10개 마을에서 생산되는 숙성 와인)를 들여와도 외면당했다.

보졸레는 부르고뉴 지역 아래 연장 선상에 있지만 ‘가메이’라는 품종으로 만들어 가볍고 상큼한 맛이 있다. 장기 숙성보다는 2~3년 내에 마시는 것이 좋다. 가격이 저렴하고 지역 음식과 잘 어울린다는 것이 장점이다.

만약 이벤트성 축제에 그치지 않고 여러 음식과의 조화를 좀 더 추구했다면 지금과는 다른 결과가 있지 않았을까? 보졸레 지역을 여행해 보면 오븐에 치즈와 함께 구운 가지 요리나 소 내장 요리 등 약간 토속적인 음식들이 보졸레 와인과 잘 어울렸다. 그래서 서민의 와인, 블루 칼라 와인이라 불리는지도 모른다. 부르고뉴 피노 누아가 귀족적 의미의 화이트 칼라 와인이라 불리는 것과 대조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찍부터 블루보다는 화이트를 택해 부르고뉴 와인의 인기가 높다. 와인을 즐기는 데도 블루와 화이트로 나눈다는 것이 좀 씁쓸하기는 하다. 우리나라 와인 애호가들은 언제쯤 보졸레만의 독특한 맛을 있는 그대로 즐길 수 있을까? 이번 11월 세 번째 목요일에는 보졸레 누보를 한잔 해야겠다. Le beaujolais nouveau est arrivé(보졸레 누보가 방금 도착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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