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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친은 주정, 푸틴은 지각 … 러시아식 예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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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3년 전 다녀온 이맘때의 러시아 풍경이 지금도 눈에 삼삼하다. 야스나야폴랴나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문호 톨스토이·도스토옙스키의 흔적을 더듬던 일, 파스테르나크·체호프가 살던 집 정원의 수북한 낙엽…. 무엇보다 끝도 없는 길 좌우를 끝도 없이 덮고 있던 자작나무 숲이 인상적이었다. 사람도 시설도 모두 투박했다. 불편했으나 의외로 소박하고 정겨운 맛이 났다. 안내원은 말했다. “러시아는 이해하려 하지 마세요. 그냥 받아들이면 됩니다.”

 로마가 동·서 제국으로 갈라진 이래 러시아가 세계의 반쪽을 지탱해왔다는 나름의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한다. 너희 잣대로 우리를 재단하지 말라는 긍지일 수 있다. 국가원수의 잦은 외교 결례까지 이런 각도에서 해석한다면 꿈보다 해몽이 좋은 전형적인 사례다. 차라리 술 좋아하던 옐친(1931~2007) 전 대통령이라면 수긍할 수도 있다. 그는 1994년 9월 앨버트 레이놀즈 아일랜드 총리와 정상회담을 하기로 해놓고 술에 취하는 바람에 약속을 깨버렸다. 총리는 비행장 활주로에서 20분을 기다리다 회담 취소 통보를 받았다. 옐친은 그 직전 베를린에서 열린 소련군 철수 기념행사에서도 만취, 군악대 지휘봉을 빼앗아 흐느적거리며 행진곡을 지휘하는 소동을 벌였다. 독립국가연합(CIS)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장을 난장판으로 만든 것도 술기운이었다.

 하긴 “세상에 추녀는 없다. 다만 보드카가 부족할 뿐”이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러시아와 술은 인연이 깊다. 애주가에 대해 러시아에선 “인생의 전반부는 간을 괴롭히고, 후반부는 간 때문에 괴롭다”고 농담을 한다. 다행인지 몰라도 옐친의 사인은 심장질환이었다. 그는 재임 중 1992년, 93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 공식방문 약속을 깨뜨린 적도 있는데, 이것마저 술 탓으로 돌리기는 어렵다. 일본의 한 러시아 전문가는 “국제사회에서 미국에 종속적인 일본을 얕보았기 때문”이라고 단정했다(요네하라 마리, 『러시아 통신』).

 블라디미르 푸틴 현 러시아 대통령은 보드카나 코냑을 한두 잔 하는 정도로, 평생 술에 취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자기 절제가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회담장에 지각하는 결례는 밥 먹듯 한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과 만날 때 40분, 로마 교황 알현에서도 15분 지각했다. 김대중(45분), 이명박(40분) 전 대통령과의 회담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난 9월 러시아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40분간 기다리게 하더니 그제 한·러 정상회담에 또 40분이나 늦었다. 80여 명의 배석자들이 쫄쫄 굶으며 기다리다 오후 4시47분에야 ‘오찬’을 시작했다고 한다. 말도 안 되는 결례고 오만이다. 이런 무례마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 입맛이 무척 쓰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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