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인정이 이처럼 아름다운 줄 몰랐어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시시각각 피가 모자라드는 재생불량성빈혈증에 걸린 이상기군(19)이 17일 상오 은사·급우·후배들의 격려 속에 영광의 졸업장을 받고 의연한 투병자세를 다짐하며 교문을 나섰다. 이날 상오9시 교장실「소파」에 누워 있다가 따로 졸업장을 받은 이군은 조준묵 교장과 김진호 담임교사의 손을 잡고 『이처럼 인정이 아름다운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 내 몸 속에서는 생의 욕구가 솟구치고 있습니다』며 울먹였고 조 교장은 『이 녀석, 너 참 강하다. 삶의 의지로 용기를 갖고 더 힘든 사회생활을 해나가야지』하며 어깨를 두드렸다. 특히 이날 이 군의 졸업식에는 이 군과 똑같은 병으로 세브란스병원 채응석 박사의 치료를 받아 2년 동안의 투병 끝에 완쾌된 황보경복씨(39)가 시흥에서 꽃다발을 들고 찾아와 이 군을 격려하며 자신의 투병과정을 알려주었다.
이날 수성고교재학생들은 임시대의원회의를 열고 선배 돕기 모금운동을 벌이기로 했고 조 교장은 졸업장과 함께 수혈비 1만원을 이 군에게 주었으며 교직원들도 모금에 나섰다.
한편 영화동 273 이 군의 집에는 16일 하루동안 각지에서 20여 통의 격려편지가 왔으며 수원시 화서동 16의2 정화석씨는 보혈에 좋다면서 염소 1마리를 끌고 와 이 군의 아버지 이근우씨에게 주고 갔다.
또 70년10월17일 수학여행길에 원주열차충돌참사를 만나 각계에서 따뜻한 온정을 받았던 인창중·고교(교장 서용택)학생 3천 여명과 서 교장 등 교직원 1백 여명은 17일 상오 연세대부속병원 혈액은행에서 1인당 1백g씩 헌혈, 이 군이 완치될 때까지 수혈토록 혈액은행에 보관시기고 카드를 이 군에게 주기로 결의했다.
이날 인창 고교는 졸업식을 맞은 이 군에게 『용기를 잃지 말고 투병하라. 완치될 때까지 계속 돕겠다』는 격려의 전보를 보냈다. 그밖에 각계에서 보낸 온정은 다음과 같다.
▲성동공고2년 오윤창군(18)=16일하오 이상기군에게 피를 주겠다고 중앙일보에 알려왔다.
▲서대문경찰서장 최광수 총경=5천원(5백㏄ 수혈분)
▲마포경찰서장 안응모 총경=5천원
▲서부경찰서장 이흥세 총경=5천원
▲한종섭 서대문구청장=1만원 본사기탁
▲우천 제약소(서울 중구 충무로3가 25) 대표·변대현씨는 이상기군에게 전해달라고 빈혈치료제 엽산정 5병(1천5백정)을17일 상오 중앙일보에 맡겼다.
▲【수원】17일 대한적십자사 경기지사 직원일동은 1만5천원을 모금, 이상기군에게 전해주도록 중앙일보수원지사에 기탁하고 이군을 위한 헌혈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투병일기>

<×월 ×일>
코피가 너무 자주 흐르는 걸 보면 내 건강상태가 아무래도 이상해지는 것 같다. 남들은 축농증으로 알고있지만 오늘은 정말 못 견딜 만큼 피를 많이 흘렸다. 종례시간 때였다. 또 코끝이 시큰거리는 듯 하더니 코피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리담임 김진호 선생님이 달려와서 종이와 손수건을 갖다대며 코를 닦아 주셨다. 친구들은 나를 코피 잘 흘리는 놈으로 알고있어 『저 친구 또 피 흘리네』하는 듯 건네 왔지만 오늘은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다. 아무래도 큰 병원엘 한번 가봐야 할 것 갈다. 그러나 돈이 있어야지.

<×윌 ×일>
김 선생님이 『오늘은 꼭 병원에 같이 가보자』해서 세브란스병원에 갔다. 앞서 부모님들과 같이 「빈센트」병원에 갔을 때와 같이 재생불량성빈혈증이라고 진단되었다. 「빈센트」병원에서는 의사선생님이 『현대의학으로는 만전을 기할 수 없다』고 암시해 주었는데 나를 본 채응석 박사님은 『해보자』고 하셨다.
진찰결과는 혈색도치가 건강인은 15g이며 6g 아래는 위험하다는데 나는3∼4g으로 나타나 극히 위험하다며 심각한 표정이다. 살 수 있을까하는 생각 속에 수혈을 했다. 열이 나고 곧 피로해지면서 자꾸 졸음이 온다. 어디고 가볍게 부딪쳐도 멍이 든다. 이병의 4개 증상이 심해진 것이다.

<×월 ×일>
앞으로 연세대「세브란스」병원에 1주일에 한번씩 수혈을 하러 다니게됐다. 의사선생님말씀은 시외버스는 요동이 심하니까 택시를 전세해서 타고 오라는 말씀이시다. 몸에 진동이 많으면 반점이 생기게 된다고 한다. 수혈은 한번에 5백㏄ 씩 한다. 비용은 5천원이다.
나는 다행히 A형이니까 피야 쉽게 구할 수 있겠지만 그 비싼 피 값을 어떻게 조달한담. 아버지의 수심에 차신 듯한 얼굴을 보면 송구스럽기 짝이 없다. 아버지는 연탄을 판돈을 꼬깃꼬깃 모아두었다가 나의 치료비로 주시는 것이다. 5백원 짜리 돈에 시커먼 연탄재가 묻어있다.

<×월 ×일>
오늘은 어머니가 어디서 구했는지 자라 1마리를 가지고 오셔서 나더러 피를 먹으라 하신다. 내 몸에 좋단다. 아버지는 매일 새벽 서호에 나가시어 붕어를 낚아 몸에 좋다고 달여주신다.
나는 매일아침 일찍 일어나 형한테 배운 태권도를 한다. 의사선생님은 심한 운동을 하면 혈액이 많이 소요되어 하루운동에 5일의 생명을 단축시킨다고 하지만 부모님이 우울해하시는 모습을 보면 내 몸에 이상이 없다는 것을 보이고 싶어서도 운동을 해본다.

<×월 ×일>
의사 선생님은 나에게 직접 말해주지 않았지만 체중이 자꾸 줄다가는 끝내 죽음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 체중은 70㎏이던 것이 64㎏으로 줄었다.
부모님들도 이것을 알고 있다. 나는 어제 부모님들의 걱정하는 말소리를 얼핏 엿들었다.
죽다니! 무엇인가 분명하지는 않으나 두려움 같은 것이 있다. 내가 죽으면 애쓰신 부모님들은 어떻게 되는가.
내 걱정을 해주신 담임 선생님은 어떠하실까. 급우들의 얼굴이 눈앞에 스쳐간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