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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0)|휴전회담의 개박<전반부>(4)|개성의 함정(2)|6·25 21주 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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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951년 7월10일, 개성에서 한국휴전회담 제1차 본회의가 열리게 되자 온 세계는 낙관적 기분으로 들떴다. 전선의 「유엔」군 장병들은 이제 곧 고국에 돌아가게 되리라는 기대에 가슴이 부풀었고 더구나 이 회담을 학수고대하던 영국을 비롯한 유럽참전국병사들 중에는 성급히 짐을 챙기는 자도 있었다. 7월8일자 「뉴요크·타임스」도 1면「톱」에 『워싱턴은 수주 내에 한국전 종결을 예견』이라는 표제로 회담전망을 낙관하는 기사를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이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았고 사태는 이와는 정반대로 꾀어 나갔다. 「유엔」군 수석대표 「C·터너·조이」제독이 탄「헬리콥터」가 개성에 접근했을 때부터 이미 공산 측의 함정은 부지런히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주인 행세하러 갖가지 잔꾀>
7월8일의 양측연락장교회의에서 「유엔」군 대표차량에는 휴전대표라는 상징으로 백기를 달도록 합의했었다. 조이 제독일행이 헬기착륙장에 내려 지프로 회담장소까지 가는 동안 차 앞에 꽂은 흰 깃발은 전화에 그을은 개성시내에서 유난히도 돋보였다. 공산측 카메라맨들은 이 백기에 렌즈초점을 맞추어 「유엔」군 대표가 항복하러 개성에 오고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이것 하나만 보더라도 유엔군 측이 개성을 회담장소로 수락한 것은 큰 실수였다는 것이 드러난 셈이다. 또한 공산군측은 자기들이 주인이고 유엔군 측은 손님이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유엔」대표를 아예 개성에 유숙시킬 계획도 세웠다.
그들은 회의장소인 내봉장서 얼마 안 떨어진 인삼장에 「유엔」군 대표 숙소를 마련하고 침대와 식사까지 준비했다. 그러나 「유엔」군 대표는 문산에 이미 「베이스·캠프」를 마련했기 때문에 공산측 제의를 거절하고 다만 지참한 주식을 인삼장에서 들곤 했다. (주=인삼장은 6·25전에 개성시서 경영한 2층 양옥의 「호텔」. 인삼껍질·잎·꽃 등을 말려 탕물에 탄 인삼탕이 유명하여 그렇게 명명했다.)
1951년7월10일 상오11시, 양측대표들은 처음에는 귀국기대에 부풀었다가 이내 실망한 일선 병사들이 빈정거리는 말로 『회전목마의 장광설』이라고 부른 회담의 막을 열었다.
「유엔」군축의 정식대표는 해군중장 「C·터너·조이」(수석), 육군소장 「로렌스·C·크FP이기」, 공군소장 「헨리·I·호데스」, 해군소장 「아레이·버크」, 한국군소장 백선엽이었고, 공산 측은 북괴군대장 남일, 북괴군소장 이상조, 북괴군소장 장평산, 중공군중장 등화, 중공군소장 사방이었다. 서로 신임장을 교환한 후 쌍방수석대표는 개회사를 했는데 먼저 「조이」제독이 입을 열었다.

<조이 제독, 의자높이 시정 요구>
『오늘 여기서 시작한 협상의 성패는 전적으로 이 자리에 참석한 쌍방대표들의 신의에 달려있다. 쌍방이 신의를 지켜야만 서로 믿을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라야만 회담의 성공을 기할 수 있다….』
「조이」대표가 앉자 남일이 발언했는데 그는 회담을 통해 공산대표들의 상투용어가 된「전체세계평화애호인민」이란 말로 서두를 꺼냈다. 중공군 등화는 『모든 국가인민은 전쟁을 결연히 증오하며 평화를 갈망한다』고 말하였다. 남일이 발언을 마치고 앉자 「조이」제독은 갑자기 바로 자기 앞에 마주앉은 공산측 수석대표가 한결 돋보이는 것을 눈치챘다.
자세히 보니, 「조이」제독이 앉은 의자다리는 남일 것보다 훨씬 짧았다. 남일는 마치 상전이 부하를 오만하게 내려다보듯이 높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조이 제독은 즉시 이 사실을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했다. 공산군측은 그게 뭐 그리 중요한가라는 태도였다.
이날 첫 본회의에 동석한 「유엔」군측 수석통역관은 회의분위기와 진행상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호레이스·C·언더우드」씨=한국명 원일한(당시「유엔」군 수석통역장교=미 해군대위·현 연세대도서관장·55)<휴전회담 때 나는 동생 원득한(현 서울외국인학교 총감)과 함께 통역을 맡았어요.
통역으로는 우리 형제와 함께 「케네드·우」라는 중국인 2세가 있었는데 그는 중국어를 통역했지요. 6·25가 나자 예비역이었던 나는 지원해서 현역으로 복귀, 부산항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7월7일에 동경의 미 극동해군사령부로 출두하라는 명령이 왔어요.
거기서 「유엔」군 측 수석통역장교로 임명되어 휴전회담과 인연을 갖게 된 거지요. 10일 첫날 회의 때 우리는 개성의 헬리콥터 착륙장에서 내려 차에 백기를 꽂고 회의장까지 갔어요. 8일의 연락장교회의에서 그렇게 하기로 합의가 됐고, 또 그것이 국제관례에도 있기는 하지만 기분은 좋지 않습디다. 마치 굴복하러 가는 인상이었으니까요. 아니나다를까 뒤에 안 일이지만 공산 측은 이 백기를 가지고 「유엔」군이 항복하러온다고 일대 선전을 했어요. 회담장 안에서의 양측위치는 이러했어요. 가운데 길다란 「테이블」을 두고 중앙에 수석대표가 앉고 양옆으로 대표들이 앉았어요.
대표 뒤에는 통역장교 2명이 서고 그 뒤에는 연락장교들과 기록담당자들이 앉아있었어요. 의제에 따라 양측대표가 발언을 하는데 가령 조이 제독이 말하면 나는 한국말로 통역하고 그 다음은 우진위가 중국말로 통역했어요. 공산 측은 남일이가 말하면 그들 통역 도유호가 먼저 중국어로 통역하고 다음에 설정식이 영어로 했어요. 첫날 회의가 시작하고 곧 이상하게 느낀 것은 쌍방수석대표의 의자높이 였어오. 남일은 다리가 긴 높은 의자에 앉아 우리를 내려다보는 자세였읍니다. 참 속이 들여다보이는 잔꾀를 부리더군요. 그리고 우리측은 탁상용「유엔」깃발을 가지고가서 「테이블」위에 놓았는데 처음에 공산 측은 그들 기가 없었어요.

<남일, 미제라이터 쓰고는 당황>
그런데 점심을 먹고 오후 회의를 할때에는 그들도 깃발을 가져다놓았는데 우리 것보다 상당히 깃대가 높고 기도 커요. 공산기자들이 우르르 몰려오더니 두 깃발을 비교해서 마구 찍어대요. 조이 제독이 항의해서 공산기자들은 물러났지만 이사진도 그들이 선전으로 이용했읍니다. 그리고 공산측 기자들은 이렇게 첫날부터 회의장에서 설쳤는데 우리기자들은 안 된다고 한참 옥신각신하다가 겨우 14일께야 개성에 첫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지요.>
한편 공산측 대표들이 첫 본 회의에서 어떤 몸가짐과 표정을 지었는 가는 「유엔」군 측 수석연락장교 앤드루 키니 대령이 1952년8월31일자 「금주」(This Week)지에 기고한 「휴전천막의 비화」(Secrets from the truce tent)에 잘 묘사돼 있다.

<7월10일의 첫 본회의 때 남일은 자못 불안한 표정으로 안절부절하며 공연히 신경질을 부리곤 했다. 그는 번번이 자기발언을 중국어로 통역시키는 것을 잊어 버리기도 했다. 그들 발언은 영어와 중국어로 통역하게돼 있던 것이다. 그는 회담이 시작된 지 얼마 안 있다가 소련제 담배에 중공성냥으로 불을 붙이려고 했다.
그러나 열번도 더 켜댔지만 성냥이 좋지 않아 불이 붙지 않았다. 그러자 당황하여 이번에는 미제 「라이터」를 호주머니에서 꺼냈다. 그 「라이터」는 단번에 불이 붙었다. 남일은 담배를 한모금 깊이 들여 마시더니 자기가 미제 「라이터」를 사용한 것이 큰 실수였다고 생각했는지 그 「라이터」를 창문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북괴군소장 이상조는 남일과는 아주 대조적이었다. 회담을 시작하고 좀 되는데 네 마리의 검은 왕파리가 이상조 얼굴 위에 달라붙어 기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이는 파리를 쫓으려고 하지 않고 목석처럼 가만히 앉아있었다. 나는 그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한 마리는 눈썹 위를, 그리고 다른 한 마리는 바로 콧잔등을 살살 기어다니는데도 얼굴 근육하나 실룩거리지 않았다. 그는 처음 앉은 자세 그대로 까딱도 하지 않았다. 나는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대체 그는 무엇을 우리에게 증명하려는 것인가? 파리가 귀찮지 않다는 것인가? 회의장에 뿌린 미국 DDT의 약효가 없어졌는가? 동양식 안면근육 단련법을 우리에게 실연하고있는 것인가 등등.

<우리측은 모두 일선지휘관>
쌍방회담대표들의 경력이나 배경은 아주 판이했다. 공산대표들은 모두가 오랫동안 직업적 당선전 사업에 종사한 자들이었다. 나이도 비교적 젊었다. 37세의 수석대표 남일은 8·15해방 후 소련군과 함께 이북에 들어와서 6·25전까지 북괴정권과 당의 교육사업을 주관하다가 괴뢰군 총 참모장이 된 자였다. 중공군 등화는 「모스크바」대학을 마치고 중공정권수립 후 만주에서 선전과 정치국책임자로 있었고 1936년에는 서안에서의 장개석 총통 납치에도 관계했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공산측 대표단의 정말 실권자는 중공군소장인 사방처럼 보였다. 앞서 말한 이상조는 북괴군 전선사령부 참모장이었고 장평산은 북괴군 제1군단 참모장이었다. 이에 반해 한국군 백선엽 소장을 포함한 5명의 「유엔」군 대표들은 모두 전투부대지휘관으로서는 혁혁한 경력을 갖고있지만 정훈이나 정보계통의 경험은 별로 없었고 더군다나 국제회의 같은 모임에는 전혀 나가보지도 못한 직업군인들이었다. 공산대표들이 철두철미하게 공산논리의 훈련을 받고 내봉장으로 왔다는 것은 벌써 첫날의 그들 개회사용어에서 나타났다.>
◆주요일지(1951년7월10·11·12일)
※7월10일▲전선소강상태 ▲휴전회담 제1차 본회의 개최 ▲이대통령, 「리지웨이」장군과 요담 ▲이 국방, 육해공 참모총장 대동코 서울행 ▲중공계 대공보, 38선 휴전요구
※7월11일▲F-86「제트」기, 적 MIG 3대 격추 ▲휴전회담 제2차 회의 ▲「리지웨이」장군, 「무초」대사와 함께 한국군참모총장들과 요담 ▲한국군수뇌, 문산에서 백선엽소장과 회담 ▲서울시민, 휴전반대궐기대회 ▲부산∼다대포간의 정기선 변리호 침몰 익사 90명 ▲평양방송, 외국군의 한국철수요구
※7월12일▲휴전회담, 공산 측의 기자출입금지 고집으로 정돈 ▲북경방송, 미의 대일 강화조약회의를 비난 ▲미국무성, 대일 강화조약초안발표 ▲「듀이」「뉴요크」주지사, 8월을 한국구호의 달로 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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